감기에 걸려 2주일동안 골골대고 있다.
나이가 드니 감기도 나이들고 심술궂은 베테랑이 찾아와 일찍 떠나지를 않고 처음엔 콧물이 흐르다가 목이 아프다가 가래가 생기다가 천식·해소같은 기침을 해대다가 소화도 안되는 등 온 몸 구석구석을 괴롭히며 아직도 장기 투숙중이다. 정말 최선을 다해 제 역할을 하는 감기 바이러스다. 이번만이 아니라 툭 하면 감기에 걸리는 내게 감기만큼 오랜동안 날 꾸준하고 열렬하게 사랑한 존재, 지순한 친구는 없다는 현실이 참 서글프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1주일, 안 먹고 버티면 7일만에 낫는다”란 옛말을 믿고 처음엔 그저 참아내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안나오고 시도 때도 없이 콧물이 흐르는 등 추잡스러워져서 병원을 찾았다. 주사도 맞고, 처방전도 받아 약을 먹었는데... 감기는 빚받으려온 사채업자처럼 떠날 생각을 않는다.




어린 시절엔 간절히 감기에 걸리길 바라기도 했다.
내가 조금 아프면 엄마가 걱정을 하고, 죽도 쑤워 주시고 당시엔 비싼 바나나 등의 과일도 챙겨 주시며 공주 대접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6남매중 막내라 오빠언니들에 치여서 자란 나는 그 때는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독점할 수 있었다. 진짜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때, “아유, 머리가 너무 뜨겁네”하며 내 이마를 짚어 주시던 어머니의 약간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의 촉감이 아직도 선하다. 목이 부었다는 핑계로 먹던 아이스크림은 또 얼마나 맛있었는지... 

또 감기를 핑계로 학교에서 조퇴를 하거나 학교에 아예 결석을 하고 방에 누워 만화책을 보거나 일기를 쓰며 딩굴댕굴하던 여유가 참 좋았다. 모처럼 평일 낮에 방에 누워 있으면 “야채가 왔어요, 싱싱한 야채...” 등등 행상 아저씨들이 확성기에 대고 손님을 부르는 소리, 동네 꼬마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져 엄마~~하고 우는 소리, 아이들을 찾는 엄마들의 목소리 등등이 한적한 골목길에서 들려왔다.

감기로 인한 미열과 감기약을 먹어 노곤한 상태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즐기던 그 때의 평화로움때문에 난 조금만 감기 기운이 있어도 엄마에게 응석을 부려 조퇴를 하거나 결석을 했다. 다행히 엄마는 “반드시 개근상을 타야한다. 아파 죽더라도 학교 교실에서 죽어라!”라고 주장하던 원칙주의자는 아니셨기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주셔서 무사했다. 그 때는 내 이불속도, 내 방도, 우리집도, 우리동네 골목도 다 평화롭고 안녕한 것 같았는데...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감기는 그런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대접받는 기화가 아니라 그저 고생스러울 뿐이다.
회사는 개근상도 없는데, 이상하게 아파도 나오게 된다.  그리고 집에서 끙끙낑낑거려봤자 우리 엄마처럼 날 걱정해주고 약을 먹여주고 보살펴줄 사람도 없다. 딸 아이는 걱정만 할 뿐이지 졸업논문써야한다, 기말고사 과제한다 등으로 바빠 날 챙겨주지 않는다. 지난 주말에도 버티다 버티다가 결국 “내 손이 내 딸이다”라고 궁시렁거리며 내가 밥을 차렸다.

‘국제 무심남 컨테스트’가 있다면 꼭 참가시켜보고 싶은 남편은 내가 신음을 해도 절대 안 들리는 신기한 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아파서 눈의 다크서클이 턱 밑으로 내려가고 얼굴색이 흙빛이 되어도 걱정은 커녕 “황토팩 했나?”고 묻는다. 내가 약을 먹으면 “감기가 약 먹는다고 낫냐?” 등의 발언을 할 뿐이다. 심지어 감기 옮으면 안된다며 나를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멀리 한다. 

예전엔 사나흘 앓으면 금방 회복되더니 이젠 적어도 1주일, 길면 보름 이상을 괴롭힌다.
또 우아하게 기침, 고열 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콧물이 너무 자주 흘러 닦다가 코가 헐고, 목소리가 금방 쉬어 제대로 말하기도 힘들고, 기침도 온 내장기관을 뒤흔들며 격렬하게 하고, 몸살도 세포 마디마디가 다 아프다. 그러면서 공포에 시달린다.

“이게 그냥 감기가 아닌건 아닐까? 혹시 폐렴이거나 암의 전조 증세는 아닐까?”
“이러다가 목소리가 회복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약을 섞어 먹었는데 부작용이 생기는건 아닐까?”

그런데 너무 신기하면서도 억울한 것은...남들은 감기에 걸리면 식욕도 확 줄고, 체중도 빠진다는데 난 그냥 얼굴만 상할 뿐 식욕은 전혀 변함없다는 것이다. “아으으응... 아이구 죽겠다”란 신음을 하면서도 머리속에서는 “뭘 먹어야 감기가 빨리 나을까. 복국처럼 속이 풀리는게 나을까, 체력보강과 피로회복에 좋다는 장어? 아니면 정신이 번쩍 들게 매운 낙지볶음?” 등 음식에 대한 생각만 떠오른다. 생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먹는다....



생각해보면 감기가 내게 꼭 나쁜 친구만은 아니다. 사실 참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감기는 나를 겸허하게, 주제를 파악하게 했다.
감기에 걸렸을 때, 난 대부분 피로에 찌들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아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감기에 걸려 스케줄이 취소되긴 했지만 덕분에 억지로, 강제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텔레비젼도 보지 않고, 책도 안 읽고 그냥 누워 있으면 내가 나를 만나게 된다. 심신이 지친 내게 “대체 넌 왜 그렇게 몸을 마구 학대하는거냐?”란 비난이 아니라 “그동안 너무 수고했다. 이젠 좀 쉬엄쉬엄 해라.”라고 내게 위로를 해준다. 

또 감기에 걸리면 에너지가 떨어져 누굴 만나도 차분하게 보인다. 목소리도 허스키하고 나긋나긋해지고 얼굴도 수척해보이고 태도도 힘이 빠져 부드럽게 보이는지 주위에선 “병발이 받는 것 같다. 감기에 걸린 상태가 훨씬 낫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하는 이들이 있다. 평소에 내가 너무 목소리나 제스추어가` 컸나도 살짝 반성해본다.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좀 공포스럽긴 했다. 의사는 “이러다가 박경림같은 목소리로 변하기도 하죠”라고 은근 겁을 주기도 했다. 덕분에 난 과묵해지고 남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하게 되고 목소리가 그저 무사히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됐다. 한 번 감기를 앓고나면 콧물이 흐르지 않는 것, 기침이 나지 않는 것, 가래가 끓지 않는 것 등 아주 사소한 일에도 격하게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예의상이겠지만 전화를 걸어 변한 내 목소리를 확인하고 “저런, 빨리 나으셔야죠” “아프지 마세요. 쾌차하세요”라고 따스한 위로를 해주는 지인들도 가슴 뭉클하게 고맙다.  

일본 경영의 신(神)이라는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도 자신이 성공한 비결을 첫째 가난한 집에 태어나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 둘째 배우지 못해 더 많은 실무경험을 쌓고 많이 배운 전문인들을 고용한 것, 셋째 몸이 약해 일에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분담시키며 항상 건강에 신경쓴 것 등을 꼽았다.

나도 감기에 걸려 내 저질체력과 약한 면역력을 통감하고 있다.
이제 연말인데 괜히 여기저기 송년회에 기웃거리지 말고, 사소한 일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오지랍넓게 이사람 저사람 일 돕는다고 나서지 말고 각계의 온정을 기대하며 여유롭고, 느긋하게 지내야겠다. 그리고 체력보강을 위해 오늘 저녁엔 삼겹살이라도 먹여줘야겠다. 감기로 완전 폐허가 된 나의 몸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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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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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유정 2011.12.05 15: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동안 글이 안 올라와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감기로 고생중이셨군요.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2. 네병 2011.12.05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푹 쉬시면서 한해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실 기회를 얻으신 것 같습니다

  3. 윤희경 2011.12.05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심남 한번 뵙고싶네요
    엄청 귀여우실것 같아요^^

  4. 윤희경 2011.12.05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프다고 이것저것 신경써주는 남편은 본인 아플때 똑같이 안해주면
    삐지더라구요..주위에서 보면
    그냥 아플때 혼자 앓는것이 조금은 외롭지만 자기애를 느끼게 되는
    좋은 시간이기도 한것같아요
    유인경기자님 건강하세여~~~

  5. 청민 2011.12.06 0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쩜 감기 걸린 것으로도 이렇게 글을 재미지게 쓰세요?^^ 역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웃으면서 아침을 맞이하네요, 참 재미 있는 글 감사합니다.*^^* 감기 얼른 나으세요~!

  6. 병발 2011.12.06 1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심남 세계대회, 내손이 딸이다...
    주옥같은 묘사에 이어
    '병발이 받는다~'에서 빵! 터졌어요^^
    늘 유쾌하게 보고 있어요, 으하하하^^
    얼른 감기 물리치고 건강회복하세요!!

  7. 정해균 2011.12.06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담근 김치처럼 맛깔스러운 글입니다. 감기가지고 이런 멋진 글을 만들어내시다니! 그런데 서방님이 아내에게 무심하고 가사에 비협조적인 것을 과장하여 꼬집었는데, 그런 행동이 없었다면 이 글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방님은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장에 꼭 들어가는 양념처럼 말이지요. 어서 나아서 아름다운 여장부의 역할을 힘차게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8. 김준년 2011.12.07 17: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네요, 감기라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시다니

  9. 유인경 2011.12.07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기하게도 감기에 대해 수다를 떨고나니 감기가 떠나려 합니다.
    이것도 수다의 힘이겠죠? 수다의 치유 능력을 실감하면서 여러분은 부디 감기에 걸리지 말고
    건강한 겨울을 나시기 바랍니다. 디도스며 FTA때문에 심란한데 몸이라도 건강해야죠...

  10. 박미화 2011.12.08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부가 절절히 사랑하는 밤을 보내고 나면 감기가 떨어진다는 친구의 말을 곧이 믿고 거룩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는데 결과는 둘이 병원에가서 주사를 두대씩이나 맞고 이틀을 꼼짝 못했답니다.
    기자님도 혹시 ㅋㅋㅋ

  11. 동훈맘 2011.12.08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토팩 했나......에서 빵 터졌습니다...하하하..
    사실 우리집에도 그런 비슷한 분이 계시거든요.
    많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우린 정말 정신력으로 버텨야겠어요...

  12. 요세피나 2011.12.12 14: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경씨~
    그 감기가 독하디 독해요.
    독감예방주사 꼬 맞으시구 과로는 금물^~^

  13. 하동엽 2011.12.13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항상 보기만 하다가 처음 덧글 남겨봅니다..
    저도 워낙에 감기 쉽게 걸리는 체질이라....올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구요...
    콧물, 기침....너무 공감했습니다..

    감기 걸리셔도 조금만 앓고 나으시길 기원합니다~~

  14. 김민경 2011.12.17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감기까지 친구로 만드는 부국장님은 정말 대단한 능력자세요^^
    마니 아프신대도 알파레이디강연 준비하시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셨네요
    일년 동안 부국장님 덕분에 강연 잘 들었습니다.
    다시 만나뵙길 소망합니다^^

  15. 날아라 분홍돼지 2011.12.29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 기자님이 사주셨던 곰탕이 (유명한 곳이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요) 갑자기 떠올랐어요.
    아. 내년에 감기에 걸리시게 되면 (마치 예정된 순서처럼) 그때는 제가 기자님께 곰탕을 대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