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동창 희숙이와 전화 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면 항상 즐겁다. 어떤 상황에서건 긍정적인 의미를 찾고 꼭 웃게 해주기 때문이다. 감기로 고생하던 내가 예전엔 감기 걸리면 약 먹고 하루이틀이면 낫더니 요즘은 열흘 이상 간다니까 이랬다.


“그래, 쥐약 먹은건 감춰도 나이먹은건 못 감춘다더라. 너라고 별수 있니? 반백년을 살았으니 부품이 태업하고 고장날 때도 됐지. 중고품이면서 왜 신상품이길 바라니.. ”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우수하거나 임원을 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예체능에 재능을 보이는 친구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들 사춘기며 대학 입시의 압박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그 애는 “난 고민이 없는게 고민이야”라고 키들거렸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아도 기죽지 않았고 뭐가 즐거운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이제 오십이 넘었는데도 그 아이의 원형질은 전혀 변치 않았다. 항상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매 순간을 행복하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세속적 출세와 치부를 한 것도 아니다. 충주에서 공부방을 하며 초등학생들을 지도하고 아이 셋을 키운다. 머리가 벗겨졌는데도 스스로 “너무 동안이라 걱정”이라는 초긍정적(?) 성격의 남편과 더불어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

 
얼마전에도 여고 동창들이 만났는데 희숙이는 식당 메뉴를 보는데 눈이 침침하다며 돋보기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출처:경향DB

 

처음엔 노안이 왔다는게 서글프기도 하고 돋보기를 쓰는게 불편했는데 편한게 더 많더라. 사물이 뚜렷하게 안 보이니까 더러운 것, 역겨운 것도 잘 안 보이고 젊은 여자애들이 입는 핫팬티나 미니스커트도 전엔 민망해서 한마디 거들고 싶었는데 이젠 잘 안보이니까 속편해. 또 귀도 점점 청력이 떨어지는데 그것도 좋은 것 같아. 누가 떠들어도 잘 안들리니까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에 신경 안써도 되고 혹시라도 누가 뒤에서 내 흉을 봐도 난 안들리니까 맘 상하거나 시비걸어 싸울 일도 없어.  기능도 약화되어 소화도 잘 안되니까 소식하게 되고 허리며 무릎이며 여기저기 결리니까 무리한 일은 안하게 되고... 자연의 법칙이 참 오묘하지 않니? 까불지 말고 매일매일 감사하란 말이겠지.

 

비록 수시로 돋보기는 쓰지만 청바지에 티셔츠 등 옷은 발랄하게 입고 목걸이, 팔찌 등 액세서리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희숙이는 “내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다”며 웃는다.


솔직히 학력, 직업, 재력, 미모력 등의 스펙으로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자랑거리가 별로 없는데도 희숙이의 내공과 평화로운 표정은 내 친구 중에 단연 으뜸이다. 요즘도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 전화드려 선생님과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이런저런 일도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들의 상담을 해주는 것도 재벌 마누라나 심리학 교수 친구가 아니라 희숙이다. 만날 때마다 파김치며 레몬을 설탕에 절인 레몬차도 싸온다. 하얀 깃의 여고생 교복을 입었을 때보다 50대의 희숙이가 더 아름답게 보이고 그 친구의 평화가 부럽기만 하다.

 

반면에 다른 친구는 자신의 노화를 인정하지 못한다. 수시로 성형수술과 보톡스 등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고 일주일에 한 번은 피부관리전문점에 가서 얼굴 리프팅 등 마사지와 각종 영양주사를 맞는다. 매일 거울을 보며 주름과 피부처짐 상태를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체중이 불었으면 단식과 운동을 한다. 분명히 나이에 비해 젊어보이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이고 또 주름이 늘까, 얼굴이 쳐질까, 뱃살이 불어날까 전전긍긍한다. 자기 딸의 옷을 입어보고 안 어울린다고 한탄을 하기도 한다. 또래 여성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어린 여성, 심지어 딸과 비교하니 백약이 무효다. 그리고 나에게도 수시로 타박을 준다.

 

“넌 어쩜 그렇게 칙칙한 얼굴색을 그대로 놔두니? 레이저 시술만 받으면 얼굴빛이 화사해지고 인상도 좋아진다구. 돈 아깝다 생각말고 제발 미모에 투자해라.”

 

하지만 환한 피부여도 늘 찡그리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것보다 민낯으로 나가면 ‘황토팩 했어요?‘란 질문을 받더라도 항상 밝게 웃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표정이 낫지 않을까.

 

자신의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만년이 달라진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이란 부제가 붙은 <노년>이란 작품에서 노년을 수락하거나 거부하기에 따라 다른 삶을 마무리한 예술가들의 일화를 소개했다.


세기의 지성이란 보부아르도 40세가 되었을 때부터 늙어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거울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나는 마흔살이다.마흔살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고백한다. <제2의 성>을 비롯, 숱한 명저를 남긴 철학자이면서도 나이들어가는 것에는 절대 초연할 수 없고 저주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는 젊은 시절부터 “삶은 유쾌하지 않다. 난 음울한 노년기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난 나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여긴다.” “난 가능한 빨리 죽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끝장났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백 살 먹은 것보다 더 늙어버렸다” 등의 말을 자주 했다. 그는 조카가 사업에 망해 자신의 집을 팔아야할지 모른다는 강박감에 불안초조해하며 더 이상 좋은 작품을 쓰지 못했고 병에 시달리며 한탄하고 두려워하다 나이에 짓눌린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만이 아니라 예이츠를 비롯한 숱한 시인과 작가들 역시 자신의 늙음을 거부하고 한탄하고 두려워했다.

 

작가들만 아니라 화가들의 자화상에도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60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기 모습을 노년의 놀라운 알레고리로 표현했다. 격류처럼 세차게 뻗어 넘치는 수염과 머리카락, 숱 많은 눈썹은 혈기왕성하기까지 하여 변함없는 생명력을 나타낸다. 얼굴 선은 경험과 지식으로 새겨져있다.  70세의 고야는 깜찍하게도(?) 자신의 나이를 부정하며 50대의 모습으로 그렸다.


보봐르가 분석하기에 노인의 자화상으로 기쁜 표정을 솔직하게 짓고 있는 것은 단 한 작품 밖에 없다고 한다. 클레망소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모네가 그린 자화상이다. 모네는 나이가 든 후 시력이 약해져 색깔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게 됐다. 그런데도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지 않고 기억력으로 지각 능력의 쇠퇴를 보완했다. 곧 그는 시력을 회복했고 고령의 몸으로 놀랄만한 걸작품을 계속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자신의 노화와 신체 능력의 저하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으며 주변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두고 삶을 사랑했다. 그가 만년에 그린 자화상은 풍요로운 노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혈색 좋은 얼굴에 웃음을 띈 채 풍성함 수염, 괘활함으로 가득한 시선이 결코 늙음이 추함이 아님을 보여준다.


릴케의 연인이자 만인의 여인으로 알려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경우, 60세에 병을 앓은 후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렸다. 풍성한 머리숱과 빛나는 머릿결이 여성성의 상징이건만 살로메는 머리카락이 빠진 후에야 나이를 의식하긴 했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비탄에 빠지지 않고 정신분석 등에 몰두했다. 한 자료에 보면 “77세에 눈을 감기까지 그녀의 치마폭에서 숱한 남성들이 그녀에 대한 사랑과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누구나 나이들고 늙는다. 가까운 곳의 글씨가 잘 안보이고, 곁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안들리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얼굴만이 아니라 손과 발까지 다 주름으로 덮이는 것이 박수쳐 환영하고 즐거운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불행과 슬픔으로만 여긴다고 뭐가 달라질까. 오히려 조금씩 조심하고 절제하고 세월을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받아들이는게 현명하다. 세계문학사에 남을 작품을 쓴 플로베르보다 청주에 사는 내 친구 희숙이가 어쩌면 더 지혜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희숙아, 혹시 이 블로그 읽으면 열무 김치 좀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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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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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존재기쁨 2012.06.13 1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친구를 두셧네요...
    세상사는 거 참..별거아닌데...
    정말 평범한것에 진리가 있는데...
    그걸 모르고 지지고볶고 아웅다웅...
    완벽함을 추구하는 집사람과 초긍정..저..
    부조화 땜시..이게 뭔지..뒤죽박죽..멘붕..
    유기자님...처방전을...ㅎ

  2. 상희 2012.06.13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무리글 읽고 혼자 실실 웃었습니다.
    맞아요. 바뀌지 않는 건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게 더 맘이 편하지요.
    저도 요즘 좋은 친구를 만나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답니다.

  3. 베갯잇 2012.06.13 16: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아직 젊지만 그래도 다 컸다고 생각하는데도 자꾸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늙을 것인가, 사실 조금 기대도 되요. 좋은 방향으로 늙어가고 싶어요. ^^

  4. 은콩 2012.06.13 16: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맞는말씀만 콕콕찝어서 해주시니...공감이 확 오네요
    사람사는게 별거 있나 싶다가..그런게 아니지 싶다가..

  5. 이수경 2012.06.13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 기자님. 결론이 열무김치였어요. ㅋㅋㅋㅋㅋ 저도 희숙이 언니처럼 살고 싶어요. 희숙이 언니 멋쟁이. 그런 친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기자님도 멋져요 ^^

  6. 너무나 착한 당신 2012.06.15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열무김치좀 보내라 에서 빵 터졌어요ㅎㅎ
    너무 솔직한 유기자님.

    • 유인경 2012.06.16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솔직하게 썼는데... 희숙이나 제 블로그에 안 들어오네요. 눈이 시려서 컴퓨터 잘 안한다나요. 열무김치는 할 수 없이 육성으로 알려야할 것 같아요. 흑흑

  7. 현딴엽맘 2012.06.15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잘 정리해준 글이네요
    글 꼬박꼬박 챙겨 읽는 독자 인데요,,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내공과 쌓여가는 지혜를 글로 풀어주시네요
    유기자님이 있어서 행복해용~~

  8. 임헌태 2012.06.16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 사는게 뭐 있어?" 라는 유행어가 다시 생각나는 글입니다.
    자존심(Pride),욕심(Greed),화(Anger)를 줄여나가는 과정이겠지요.

  9. 감추사 2012.06.20 2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경향신문을 뒤적이게 됩니다. 유기자님의 글이 보고파서요.

  10. 김경미 2012.07.06 2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간만에 들려 웃고 갑니다.
    요즘 불타는 금요일 밤에 남들은 유흥으로 즐거운데, 아이 둘 키우는 저는 유기자님 덕분에 이렇게 세련되고 고상하게 이 밤을 즐기네요.
    둘째 낳고 몸도 예전 같지 않고 그래서 속상한 일도 있지만, 아이 낳기 전에 누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곤 했는데 이젠 아줌마라는 호칭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남들 다 힘들다 하는 아들 둘 키워내는 내가 못할 게 뭐있으랴 자신감까지 생긴답니다. 아들 둘 키우는 엄마는 전생에 죄가 많은거라는데, 이렇게 기세등등 자신만만이라니 저 희숙님 못지 않죠?
    열무김치!
    담글 줄 안다면 바쁜 유기자님께 담가 보내드리고 싶지만... 음식 솜씨가 집안 사람들 허기만 겨우 면하게 해주는 수준이라 ㅎㅎ 안타깝습니다.
    즐거운 금요일 밤 보내세요!

  11. 이문연 2015.11.20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