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 잡지에 50년을 해로한 부부가 소개됐다. 비결을 물었더니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여러명의 남자와 살았기 때문이죠. 열정적인 연인, 일에 몰두하는 냉철한 직장인, 자기 사업을 시작한 개척자, 가정적으로 변한 중년, 그리고 공동의 취미를 나누는 친구가 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편이 다양한 모습을 보였기에 50년을 한 남자와 살아도 전혀 지루할 틈없이 살았답니다.”   

 

그 부인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지만 나도 남편의 다양한 모습과 변화를 절감하고 있다. 나이들면서 남편이 자꾸 변해가기 때문이다.


세월따라 청년에서 영감으로 변하는 외모상의 변화는 이해하겠는데 태도와 감성의 변화는 좀 당혹스럽다.
 
“아니 저러면 안되지. 그 사람이 잘못한게 아닌데 참...”  “역시 김은숙 작가는 날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저 맛깔스러운 대사들 좀 봐.”


요즘 남편이 드라마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말들이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치 텔레비젼 드라마 속의 사람들과 직접 교감을 나누는듯 자꾸 궁시렁거린다. 심지어 슬픈 상황에선 눈물이 그렁그렁거리기도 한다.

 

부부 이미지 ㅣ 출처:경향 DB

 

 

26,7년 가까운 결혼 생활 가운데 하품할 때 저절로 나오는 눈물 외엔 남편의 눈물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드라마만이 아니다. ‘나는 가수다’ 등에서 가수들이 감미로운 추억의 노래를 열창하면 눈에 눈물이 맺힌다.

 

지역감정 조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나와 가정생활에 대해 무관심, 무반응, 무뚝뚝, 무대책 등 4무를 철학으로 신봉하던 남자다.

 

평소에 말도 별로 없고, 내가 말을 걸어도 시큰둥하고, 텔레비젼도 뉴스나 스포츠중계, 그리고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을 보던(아니 보는 척하던) 사람이 50이 넘더니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사극은 물론 멜러드라마, 주말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다가 50대 중반에 이르러 드라마 주인공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는 경지에 이르렀다. .

 

소퍼에 누워 드라마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남편을 보면 결혼 초에 내가 드라마를 챙겨 볼 때마다 “한심하게 저런 걸 왜 보냐. 다 허구인데. 드라마말고 야구나 보자”며 채널을 돌리던 인물과 동일인인지 의심스럽다. 그동안 어떻게 말을 참고 살았을까.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만큼 충격적 변화는 남편이 장보기를 즐긴다는 것이다. 찬거리가 떨어졌다해도 “그냥 동네 수퍼에서 배달시켜” “귀찮아. 그냥 없는데로 살아.” 등으로 일관해 내 부화를 돋궜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애걸복걸해야 마치 억지로 끌려가듯 따라 갔고 마트에 가서도 침묵시위를 하거나 “그건 살 필요없다”란 말만 하더니....

요즘은 마트에 가면 자기가 좋아하는 맥주부터 안주와 찬거리를 척척 고르고, 할인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살피기도 하고 혼자 직접 장을 보기도 한다. 동네에 매우 싼 채소가게를 발견한 후에는 수시로 나물과 채소류를 사갖고 온다. 대견하고 고맙기보다는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내 생일은 커녕 내가 몇살인지도 모르고 아무리 내가 아파도 무관심한 남편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리고 일방적 모노드라마이긴 하지만 화도 많이 냈다. 하지만 울고불고 화를 내도 안 변하기에 나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 내가 생각을 바꿨다. 애틋한 남편이 아니라 피차 서먹서먹한 ‘오촌당숙’처럼 지내기로 말이다. 오면 왔나보다, 가면 갔나보다, 외박을 하면 하나보다, 그래도 사고를 당한게 아니니 경찰에서 연락이 안오겠지라고 나를 다독거리며 살았다.

 

서로 별 대화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 싸울 일도 없었다. 우리 부부의 대화는 그저 딸 아이에 관한 것, 혹은 뉴스에 나오는 다른 세상 이야기뿐이었다. 정치 이야기, 재벌들의 상속문제, 스티브 잡스 이후의 애플사의 문제 등 그야말로 모처럼 만난 오촌당숙과 세간의 관심사를 나누는 지적이고 오소독스한 분위기였다.
 
50 고개를 넘더니 오촌당숙이 사촌언니로 변했다. 남성들은 중년이 되면 남성호르몬은 줄어들고 여성호르몬이 증가해 여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괜히 센티멘탈해지기도 하고, 서정적인 감성이 풍부해지고 수다스러워진단다. 남편이 마치 집 근처에 살아 교류가 잦은 사촌언니처럼 내 곁에 앉아서 드라마에 심취해 줄거리나 출연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ㅇㅇ마트보다는 ㄱ수퍼가 채소가 싱싱하다” 등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다. 또 전에는 보약을 줘도 관심도 없더니 요즘은 유통기간이 지난 온갖 비타민과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이러다가 곧 뜨개질도 하고 십자수도 놓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다.

 

문제는 나의 변화다.


결혼 초에는 남편과의 대화가 너무 간절했는데 요즘은 남편이 뭘 물어봐도 대답하기도 귀찮다. 드라마를 봐도 줄거리에 감동하고 감정이입이 되기 보다는 내 또래 중년 여배우의 옷이나 최근 성형수술로 리모델링한 얼굴 등에 관심이 간다. 드라마보다 뉴스 프로그램이 더 흥미진진해진다. 장보는 것 역시 귀찮다. 나 역시 보통 여성이어서 중년이 되자 남성호르몬이 펑펑 샘솟아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공격적이 되고 여자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한쌍의 원앙 ㅣ 출처:경향DB

 

그래도 가족인데 마냥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사촌언니와 잘 지내려면 언니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남편이 아니라 내가 늦게 들어와 챙겨보지 못한 드라마의 줄거리를 물어 보기도 하고, 같이 볼 때는 남편이 잘 모르는 조연 배우들에 대핸 설명도 해준다.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남편이 드라마를 보면 중얼거려도 그려려니 한다.

그리고 자꾸 내게 말을 거는 것이 귀찮아서 개를 기르기 시작했다. 내가 천식환자라 털이 긴 개를 키울 수가 없어 털이 잘 안빠지는 토이푸들을 키우는데 여간 애교장이가 아니다. 남편은 늦둥이를 본듯 개를 예뻐하고 산책도 시키고 수시로 개와 대화를 나눈다.

 

“뭐라구? 네가 생각하기에도 엄마가 너무 똥배가 나왔다구? 하하하” “너는 아빠가 제일 좋자?”


딸 아이도 아빠의 변화에 대략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딸이야 결혼해 떠나면 그만이지만 난 어쩌나..

 

그리고 마당에 텃밭도 만들었다. 상추나 허브를 키우면서 너무 행복해한다. 슬슬 채소 키우기부터 연습을 시켜 귀농학교도 보낸 다음에 정말 시골로 보내고 싶다. 물론 나는 도회적 여성이고 직장도 서울이니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닌가보다. 선배를 만나 남편이 사촌언니같다고 하니 “사촌언니가 곧 아들, 그것도 막내아들이 된다”고 했다.

 

“얘,  사촌언니는 대화라도 통하지. 요즘 우리 남편은 생전 안먹던 과자를 찾고 자기보다 아들에게만 신경써준다고 난리다. 내가 모임에라도 나가려면 자기가 참석해도 되냐고 묻기도 하고, 조금 늦으면 심통부리고... 꼭 우리 아들 초등학생 때 모습이라니까. 그래도 조금만 칭찬해주면 이제 청소도 곧잘한단다. 완전 아기야, 아기.”


문제는 그 아기가 정년을 앞둔 대학교수라는 것이다. 학교에선 근엄한 교수이지만 집에 돌아오면 10대 학생같다니...   

 

점점 늙어가는 남편과 그래도 무사히 살아가려면 막내아들 다루듯 귀여워하고 칭찬도 자주 해야겠다.


하긴 남편 역시 점점 누나나  어머니처럼 변해가는 내가 잘 적응이 안될게다. 어쩌면 날 형으로 여기는건 아닐까. 어쩐지 내가 뭘 가지러 근처에만 가도 흠찟흠찟 놀라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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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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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촌언니 2012.06.26 15: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하하하하~~정말 공감백배입니다^^
    우리 남편이 사촌언니 수준에라도 그냥 머물러 있으면 좋으련만,
    질문이 많아진 거 보면 '아기'가 된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어찌하면 좋을까요?

  2. 명선생 2012.06.26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씨의 남편사랑을 요렇게 흘려놓으니
    남편되시는 분은 행복하겠습니다.
    색쉬한 내용이라 날 뜨거운데 더 더워지네요!

  3. 바람난 윤식이 2012.06.26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남 8년차로 접어든 내 여자는
    내게 이런 사랑의 모습이 없고
    거짓과 위선으로 일관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유기자님!
    조언을...

    • 판교S 2012.06.26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인경기자 대신 제가 한마디 할께요.
      상대 여자분을 사랑하는건 맞는데,
      좀 병(?)적인것 같네요...
      왜냐하면 사랑하기에 이런 게시판같은 블러그에서
      심정을 토로하고 미워하듯 표현하면서
      유기자님께 조언을 구 한다는건 병적인 행동인것 같습니다.
      하긴, 사랑은 여러 형태의 사랑도 있다긴 하던데ㅠㅠ

  4. jessie66 2012.06.26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늙지도 않은 울 남편, 제 모임에 따라가겠다고 앙탈을 부립니다.
    왜 그러나..했더니 아들이 되어가는 과정이었군요.(실제 울 아들은 그러지도 않았어요..)
    자신없네요..
    아들 다 키워 이제 홀가분한데 이건 뭐 귀염이도 아니고 심통내는 아들이라니~

  5. 이네 2012.06.26 22: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껄껄~~ 지금 유인경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저의 웃는 소리입니다, 분명 나에게도 남성호르몬이 펑펑 샘솟나봅니다 그러니 사촌 언니가 아니 사촌 동생같은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하는게지요,,,

  6. 친구하면 되겠네 뭐~ 2012.06.27 0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친구삼아요.
    저라면 그렇게 하고(?) 살텐데... ^^;;

  7. 박남규 2012.06.27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촌언니......
    아침부터 모니터 보면서 키득키득...^^
    늘 감사합니다. 웃게해주셔서..ㅎㅎ

  8. 반딧불이 2012.06.27 1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 기자님.
    남녘도시 마산에 사는 50대 아낙입니다.
    예전부터 기자님 글도 자주 읽고, tv 프로그램에서도 뵈었기에
    저는 기자님을 제법 알고 있는, 먼 7촌 아지매와 나 사이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글 읽고 한참을 웃었지요. 혼자.

    저희 남편은 농부입니다. 시를 쓰면서 가지와 고추농사를 하지요.
    흙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직한 사람이지요.
    농사를 지으려면 혼잣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안성맞춤이예요.
    가지와 고추들도 말을 걸어주면 훨씬 잘 자라거든요.

    남편이 아들로 진화하시기 전에 얼른 보내드리세요.
    나중엔 함께 가자고 조르실지도 모르니까!

  9. 상희 2012.06.27 15: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기자님과 나이가 동갑입니다.
    동감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울 남편도 절대 보지 않던 드라마도 보고, 마트고 같이 가고...
    ㅎㅎㅎ
    사람은 비슷하게 변하나 봐요.

  10. 야간열차 2012.06.28 1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합니다.나이가 들수록 부부간에 취미생활을 함께하는게 좋은것 같네요

  11. 사헤라자데 2012.06.29 09: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욱껴여~~

    울영감두 결혼할 땐 저더러 자기 '이상형'이라구 꼬득이더니
    이제와선 저더러 '동네 건달 형' 같아졌다구........아놔~~~~ㅋㅋㅋ

  12. 고수부지 2012.06.29 2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남편과의 결혼을 절대로 후회안한다라는 책이 출간예정 같네요~언제나 즐거운 글에감사^^

  13. 건희맘 2012.07.03 0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정말 그렇게 남편들은 변한는건가요?
    아직 저희는 과도기인가봐요..서로 아직도 포기못하고 팽팽한듯..체념한듯...
    이렇게도 재미없게 사는 부부가 있나 싶기도 하네요ㅠㅠ

  14. 븟신 2012.07.06 1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들러서 잼있는 글 읽고 갑니다.

    이런 소소한 일상을 유기자님 말고는 누가 이렇게 적절하게 공감대를 이룰수가 있을까요?

    또한번 존경하고 말았슴다.

    ............

    오촌당숙보다는 사촌언니가 훨 낫지않나요??
    발전된 관계 축하합니다.
    ^^
    근데 여기 비번은 왜 입력하라 하는건지 매번 궁금해집니다. ..

  15. 애독자 2012.07.06 13: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재밌어요. 사촌언니에서 아들로 그것도 막내 아들이라...
    남편에게 부인은 어떻게 변해가는 존재일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로 남을까요?


  16. 기원섭 2012.07.10 0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집 분위기를 들여다 본듯한 오늘 이 글,
    고맙습니다.
    저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왕 변하는 거,
    확 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힘듭니다.
    제가 변하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변한 것 하나 없다고 우기는 아내때문입니다.
    조금 더 변하기를 바라는 것으로도 충분할 텐데...
    남편의 변함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좀 기다려주는 아내의 아량,
    저는 겨우 그것만 바랄 뿐입니다.
    지난 오랜 세월,
    이미 기다려줬으니 말입니다.
    그 조금 더,
    그것을 못기다리느냐는 거지요.


  17. 대구아지매 2012.07.12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촌언니는 부럽네요
    저는 친구처럼 사는것 같아
    엄마가 될까봐
    요즘 요리에 도전 할수 있게 해 줘요
    "매콤한 오징어 볶음 먹고 싶다"
    그러면
    "나는 뭘 할까?"

    몇가지 요리는 정말 잘 한다고 칭찬 자주 했더니
    나중에 은퇴후 식당 하고 싶어 하더라구요. 헐~~~

    은퇴후 세끼 식사중
    한끼는 남편이 신나게 준비 하게 하는게 제 목표(?)랍니다

  18. 초코초키 2012.08.17 14: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웃겨서 죽었음

  19. 화소 2012.09.06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쩌면 이리도 제 모습을 이리 맛갈스럽게 풀어내실까나.
    한참 웃으면서 봤습니다.
    정말 옆에서 대답하기도 귀찮을때가 많은데...

  20. rica065 2014.12.17 1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자 읽다 웃다 눈물까지 흘립니다 저희는 오촌당숙에서 사촌언니패스하고 막내아들로 가는 중입니다 아~~ 엔돌핀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