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모자로 ‘팔순의 멋’, “자연스러움이 나의 패션”

재키 스타일, 백남준 스타일, MB 스타일…. 어느 사람을 규정짓는 것은 그의 인품과 재능보다 그의 스타일과 이미지다. 옷차림 등 겉모양만이 아니라 내면의 매력이 그의 스타일을 만든다. 때론 나비넥타이 등 소품으로, 혹은 평생 고집하는 머리모양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 이들의 스타일을 확인해 멋의 정체를 알아본다.



팔순을 앞둔 그레이스 리가 가장 즐겨 입는 셔츠와 청바지. 헤어·미용 이희 헤어앤메이크업.  / 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일흔아홉의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 선생이 최근 즐겨 입는 옷은 청바지다.

“막내딸이 오래전에 사준 건데 그땐 살이 쪄서 못입었어. 암 수술 후에 20㎏이나 체중이 빠지니까 이젠 아주 헐렁하네. 팔순이라고 청바지 못입으란 법이 있나?”

대한민국 최초의 유학파 헤어디자이너로서 국내에 단발머리 돌풍을 일으켰던 그레이스 리 선생은 요즘도 단골의 머리 손질을 해주고 패션지 ‘바자’에 요리 칼럼을 연재하는 등 맹활약 중이다.

요즘 같은 고령화시대에 79세 현역은 화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흔 넘어 발병한 유방암·위암·대장암 등 3번의 암수술을 받고 최근 암세포가 다시 퍼져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고 신세대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큼 근사한 패션감각을 자랑하는 그의 열정은 경이롭다. 최근엔 청바지와 모자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제일모직의 정구호 상무는 “한국에서 가장 패션감각이 뛰어난 이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그레이스 리 선생을 꼽았다.

“그레이스 선생님의 멋은 일부러 꾸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죠. 당당한 자신감이 그분을 언제 어디서나 멋지게 보이게 하는 것 같아요.”

그레이스 리 선생은 이화고녀(현 이화여고) 시절부터 멋을 부렸다. 학교 근처 세탁소가 아니라 명동 의상실을 찾아가 교복을 세련되게 개조해 입었다. 1960년대, 전업주부 시절에도 당시 유행하던 벨트 묶는 트렌치코트의 맵시를 살리기 위해 코트 속에 얇은 속치마만 입었단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리본 등 장식이 달린 옷은 입은 적이 없고 반지·귀고리 등의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는다.

“난 일부러 멋을 부리거나 누굴 흉내내 본 적이 없어. 그저 나답게, 편안하게 살려고 했지. 다들 너무 인공적이니까 나 같은 자연스러움이 귀해 보이나 봐.”

그는 헤어디자이너의 품격을 올린 선배로 존경받고 79년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한국 최초의 금메달을 따내 국민훈장도 받았다. 91년엔 ‘그레이스 리 커팅클럽’을 만들어 후배 미용인들을 위한 기술 보급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반쪽 미용인’이라고 한다. 헤어디자이너는 파마·염색 등을 다 해야 하는데 그는 오로지 디자인과 커팅만 했기 때문이다. 머릿결을 살리고 얼굴형을 살리는 커팅, 선의 미학에 충실했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야. 자신의 체형에 맞는 단순한 선을 강조해야 장점이 드러나지. 청바지는 입기도 편하고 바지선도 근사하잖아.….”

패션에 대한 자신감은 결국 삶에 대한 자신감이다. 그는 1년 전 말기암 선고를 받고도 기적처럼 잘 견뎌내고 있다. 지난달부터 다시 항암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빠져 50년을 고집하던 단발머리를 잘라냈지만 그 그악스러운 암세포도 그의 당당함과 생의 열정은 파괴하지 못한다.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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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동DJ 2010.10.18 2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친구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여성으로 참 멋지신 분입니다.
    건강이 안좋으시다는데 오래 오래 잘 사셨으면 합니다.
    예전 남해안에서
    저희들 맛있는것 챙겨주시고
    밤에는 저와 함께 데이트하듯
    음악이 있는곳에서 제가 "Wonder Land By Night"이란 팦송을 불러 드렸더니 환한 표정으로
    젊은 날이 생각 나신다며 좋아하시던 그 모습을 잊을수가 없네요.
    유인경기자의 글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될줄 몰랐습니다.

  2. king size memory foam mattress 2011.12.31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항상 모자의 종류와 그녀와 같은 하나 싶어 해요! 그럼 좋은!

  3. 박혜연 2013.08.11 2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레이스리 선생님은 미용사라기보다는 이용사라고 불러야 할정도로 오로지 커트만 담당하셨던분으로 평생을 단발머리만 고집하시다가 돌아가시기 몇달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짧은숏커트머리를 하신걸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