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자 관계가 복잡(?)하다. 결혼해 27년째 한 남자와 살고 있지만 친오빠만 4명, 사촌오빠 등 남자친척은 부지기수, 남녀공학 대학을 나와 남자직원 위주의 신문사에서 일하서 숱한 사람들을 만났고 한때 시사주간지 편집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남성들을 인터뷰한 덕분이다. 

 

그런 이력탓에 사람들은 가끔 내게 “그동안 만났던 남성 가운데 누가 가장 멋진가” “직접 보니 제일 휼륭한 남성은 누군가” 등을 묻는다. 수십년간 쇠고기를 다뤄온 장인이라면 “어떤 쇠고기가 제일 맛있는가”란 질문에 “마치 하얀 눈을 흩뿌린듯 마블링이 점점이 박히고 힘줄은...” 등의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하지만 아무리 수십년간 숱한 남자를 관찰했어도 어떤 남자가 품격있는 신사인가란 물음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렵다.  

 

최근에 방영된 SBS <신사의 품격>은 ‘신사’와 ‘품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고교동창인 41세 남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 드라마를 보면서 “대체 누가 신사이고 무엇이 신사의 품격란 말인가?”란 의문을 품게 됐다. 안정된 전문직, 좋은 집과 자동차와 아름답고 멋진 부인이나 애인을 둔 남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나 태도는 신사라기보다 철없는 소년같다. 미국 드라마이긴 하지만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여주인공들이 훨씬 속깊은 우정을 나누고 애인이나 남편에게도 배려심이 큰 것같다.   

 

 

 

 

 

여전히 공식석상에서는 “신사숙녀 여러분~”이란 말로 행사를 시작하고 남성들이 입는 정장을 통칭 ‘신사복’으로 부를만큼 신사란 말을 너무 흔하고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정의하기는 힘든 단어다. 또 품격이란 말 역시 개인이나 국가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밥상머리에서의 식사예절부터 대화의 내용까지 다채롭지만 “아, 이런게 품격이군”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신사, 즉 젠틀맨은 원래 영국 사회의 한 계급에 속하는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젠틀맨의 복수형인‘젠트리(gentry)’는 런던의 본류 사교층에게 인정받지 못한 하급귀족들을 가리켰다. 지방에 살던 그들은 큰 부를 쌓지는 못했지만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다. 시민계급이 부상한 후 하위귀족뿐 아니라 중상류층도 의회의 일원에 포함됐고, 사람들은 변호사, 의사 등 소수의 전문직들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인들까지 젠틀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뭐 쉽게 말하면 신사의 기본은 돈이긴 하다.

 

영국에서 신사란 뚜렷한 신분체계나 제도가 아니라 문화적인 의미가 강하다. 젠틀맨의 정의가 확립된 빅토리아시대에 신사란 ‘완벽한 인간상’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취향, 최고의 교육뿐 아니라 스포츠에 대한 재능과 마초적인 모험심 또한 당시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류층의 자질이었다. 저술가이자 사회개량가였던 스마일스는 신사를 “정직하고 신실하고 올바르고 겸손하고 온화하고 용기 있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스스로 돕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비평가 존 러스킨도 “탁월한 상상력과 순수한 유전자를 바탕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동정심 역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계층들의 수고 덕분에 살아가는 자신의 책무를 아는 것이 젠틀맨의 정수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신사란 말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같다. 남자들은 다른 남성들에 대해 평가하면서 “아, 그 사람 진짜 신사지” “아주 신사답게 처신하더라”란 표현을 쓴다. 반면 여성들은 “우리 애인은 참 신사야”라거나 “그 선배의 신사다운 태도에 존경심이 느껴졌다”란 말은 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정된 직장이나 직업, 소유한 자동차와 집의 규모, 착용한 시계와 옷의 브랜드로 “괜찮은 남자다” “멋진 남자다”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록 왜곡되고 탈색되었어도 여성들은 여전히 남자의 신사다움을 기대한다. 그리고 진정한 신사가 여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원해주리란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럼 신사의 품격이라면 떠올려지는 한국 남성은 어떤 분들일까. 이 컬럼을 쓰기 위해 나는 20~50대의 여성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말하는 신사의 조건과 품격을 물어봤다. 그들이 강조한 신사의 품격은 이렇다.

 

우선 신사의 품격에서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다. 앞과 뒤, 겉과 안이 일치하는 것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 가운데에서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들이 많다. 높으신 분들에게는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며 웃음짓다가도 부하직원이나 식당 종업원에게 “야, 물수건 갖고 와” “이런 쓰레기같은 자식들” 등의 비속어를 남발하는 이는 절대 신사가 아니다.

 

기업체에서 강의하는 전문강사들을 주로 태워다주는 렌터카업체의 기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매너나 예절교육전문가들 가운데도 실상 상스런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교양없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단다. 길이 막히는데 천천히 운전한다고 온갖 쌍욕을 퍼붓다가 차에서 내린 후 옷깃을 여미고 강단에 서서 “여러분, 우리 생활에서 매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라고 말하는 걸 보면 구토가 나올 지경이란다.

 

그런 면에서보면 서울대 총장이나 총장 시절에도 비서나 운전기사, 술집 종업원에게도 항상 깍뜻하게 존대말을 하던 정운찬 전 총리는 신사의 품격을 갖춘 셈이다. 배우 안성기씨도 확실히 신사다. 영화인들은 그의 인간미를 더욱 칭송한다. 유명배우는 물론, 조명기사 촬영조감독 등 자신과 일했던 스탭들의 경조사에 그는 가능한 꼭 참석한다. 매니저나 후배를 통해 화환이나 봉투만 보내도 되련만 그는 꼭 찾아가서 축하와 애도를 직접 표한다. 촬영보조기사의 부친상에도 참석하기가 어디 쉬운일인가.

 

배우 안성기. 이상훈 기자

 

 

반면 한 기업체 간부는 내가 만나본 중년남성 중 가장 점잖고 젠틀한 태도를 보였다. 오랜 해외생활 덕분인지 식당에서도 의자를 먼저 빼준다거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레이디퍼스트~”라고 말하는 것이 역겹거나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정작 집에 초대되어 가보니 그 부인의 얼굴에 수심과 기미가 가득했다. “멋진 남편을 둬서 좋겠다”는 덕담에 내 손을 부여 잡더니 “그건 대외접대용 태도”라며 한숨을 쉬었다. 밖에선 관대하고 자상해도 매우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신사가 아니다.

 

사고의 유연함이 품격을 만든다. 사람을 평가할 때 학벌이나 명함에 박힌 지위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신사다. 한국사회에서 지성인이라 칭하는 이들의 모임에 가면 “그 친구가 경기고 68회지?” “얼마전 예일대 동문회에서 만났어요.” “아, ㅇㅇ기업 전무시군요. 아무개 부회장 아시죠? 내 사촌동생입니다. 그 형이 아무개 장관이죠. 하하핫” 등 학교와 직업과 직위로만 사람을 분류하고 주변인물로 자신들의 인맥을 자랑하는 이들은 아무리 드드드(하바드대학, 스탠포드대학원 옥스포드 박사)의 학벌을 자랑해도 신사가 아니다.

 

언젠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방송에 나오는 유기자님이죠? 제 친구 이성호(연세대 전 부총장)도 아침방송에 자주 나오는데... 지난달에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나서 술 한잔 했어요. 짜식이 방송에선 잘난척하는데 친구들이랑 있으면 개구쟁이에요.”라고 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친구와 만나 개구쟁이 노릇을 하는 대학 부총장은 신사라고 불러드리고 싶다. 두산의 박용만 회장은 SNS 투위터로 각계각층의 팔로워들과 교감을 나눠 트위터 어록이 만들어질 정도다. 어린 신입사원과도 격의없게 대화하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태도가 비록 가끔 비속어를 사용해도 신사 확인서를 보내드리고 싶다.

 

신사의 덕목중 중요한 것이 책임감이다. 프랑스의 지성인들은 유독 바람둥이가 많다. 최근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물론 대표적 문호인 장 폴 사르트르, 소설가이자 외교관인 로맹 가리도 연애편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두사람은 사랑하는 여성들에게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책임졌다. 사르트르는 계약결혼으로 맺어진 보부와르와 평생 동지로 지내면서 그녀의 제자를 비롯, 다양한 여성들과 사랑을 나눴다. 그는 모든 수입을 그 여성들에게 선물과 생활비로 나눠주고 정작 자신은 낡은 옷에 만족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밤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콩쿠르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로맹 가리 역시‘네 멋대로 해라’의 여주인공인 미국여배우 진 세버그와 이혼후에도 AS를 했다. 진 세버그가 나쁜 남자들을 만나고 흑인인권 운동에 개입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완벽히 해결해주고 대변인을 자처하며 생계도 책임졌다. 평생 한 여성에게만 순정을 다하지는 못했다해도 적어도 사랑하는 순간은 진실했고 그 이후에도 책임지는 남자가 신사가 아닐까.

 

배우 소지섭. 이석우 기자

 

 

소간지라 불리는 소지섭도 신사라고 믿고 싶다. 친구 박용하가 자살했을 때 그는 그 바쁜 와중에도 장례식장을 지키고, 장례비 일체를 냈다. 그거야 돈많은 남자의 의리라치자. 어느 패션업체행사에서 그해의 수상자로 선정된 그가 참석한걸 본 적이 있다. 무려 3시간동안 하염없이 상만 주는 지루한 행사인데 그는 미동도 않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장인이 뺄강이다’란 지적을 받자 거침없이 “그럼 (장인의 이념이나 사상때문에) 내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그 촌스런 얼굴이 그 어떤 영국신사보다 근사해보였다. 정치건 아내건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니 말이다.

 

무엇보다 신사의 품격은 여성을 대할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에게>란 책에는 나나미 여사가 극찬한 이탈리아 전 총리가 등장한다. 지독하게 못생긴 외모의 그 총리는 나나미씨가 방문하면 격하게 반가워하면서 비서에게 “나는 나나미씨와 대화를 나눠야하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한 전화 연결하지 말아요”라고 말했단다. 적어도 자신을 대하는 순간, 전 우주에서 자신밖에 없다는 충일감과 존중감을 보여주는 태도에 나나미씨는 그를 진정한 신사라고 평가했다.

 

수필가이자 서울대 영문과 교수였던 피천득 선생도 신사다. 그는 늘 주변 여성에게 친절했지만 평소 흠모하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을 예이츠 등 시인과 철학자들 사이에 장식해두었다. “저승에서도 이런 지성인들과 대화를 나누라는 나의 배려죠. 애인(본인)을 잘 두니까 버그만도 이런 대접을 받는거지.”라고 해맑게 웃던 95세 노인의 표정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언젠가 MBC <무한도전>에서 상황 설정을 해서 각 멤버들의 신사도를 시험한 적이 있다. 각각 다른 여성작가들과 걸어가게 하다가 자동차가 가까이 오도록 했는데 유재석씨는 재빨리 여성작가를 끌어당겨 안전하게 인도로 피신시켰다. 그가 아무리 촐랑거리며 메뚜기 춤을 춰도 야동을 즐겨 본다해도 나는 그가 신사라고 생각한다. 반면 아득한 옛일이긴하나 회의를 하다 밤늦게야 끝났다. 운전을 못하는 내가 “이 시간에 택시도 잘 안 잡힐텐데...”라고 구시렁거리자 한 선배가 “자기는 얼굴이 무기고 몸매가 흉기인데 무슨 밤길 걱정이야. ”라며 웃었다. 그 놀라운 위트와 몰지각한 매너에 그후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제2의 성>을 쓴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했다. 남성들 역시 타고난 DNA나 성격보다 평소 노력하고 공부하고 자신을 정제하면서 신사로 탄생하는 것 같다. 품격 역시 돈으로 사거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갈고 다듬어서 만들어진다. 그건 절대 골프장이나 룸살롱에서 다듬어지는건 아닌데 왜 그런 곳에 모인 남자들이 자기가 신사라고 주장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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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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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촌 하숙생 2012.08.12 2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에서야 독도를 재빠르게 다녀온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품격은 어떤지요?

  2. 이수경 2012.08.13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저도 신사의 품격 보면서 역겹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잘 보지도 않았고요. ㅎㅎㅎ

  3. global 2012.08.13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 보니 진짜 신사는 언행이 일치 하는 남자 일것 같군요

  4. 네병 2012.08.14 0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5. 서울 2012.08.15 0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유 기자님 글은 여느 사회학자나 요즘 지리멸렬한 글 일색의 신문컬럼니스트들의 글보다 훨씬 뛰어나고 오히려 신선합니다. 댓글 로그인을 생략한 것을 봐도 개방적 수용의 자세가 보입니다. (요즘 신문은 '찬성, 반대'를 하기위해서도 로그인을 요구하는데 그건 왠만하면 하지말라는 것이지요).
    오늘 글의 단 하나 실수: 프랑스의 사르코지는 지성인이나 지식인의 부류에 못든답니다. 그의 별명 "블링블링"이 말해주듯 그는 오히려 '천박한 신참 부유층'에 든답니다.

  6. 신 무기 2012.08.15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선배의 "얼굴이 무기.몸매가 흉기라는 멘트"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수 있을까요?
    저는 얼마전 시골 시댁에 작은 행사모임이 있어 참석 했을때 식사후 거실에서 끼리끼리 나이데로 모여서
    담소하는중에, 사촌 손위 시누이가 "나는 나가면 아무도 칠십으로 나를 안본다"며 으쓱하는 시늉을 했다.
    참고로 그분은 그닥 "세련"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분인데, 너무 좀 오바하는것 같아서 슬쩍,"요즘 대부분 자기 나이 안보잖아요,십년정도 뻬라고들 하던데요,했더니 아니란다 자기친구들은 모두들 칠십으로 보인데나.
    듣고 있던 남편,죽으로 가만이나 있었으면 2등이나 할건데,불쑥 나를 보더니 자네는 칠십다섯으로 보인다 했다.
    큭큭.지는 정확히육학년 삼반인데, 남편한테 한방 맞고나니 얼마나 섭하든지.오는길에 여러가지 그간 있었던 말들을 따지면서 "겸손도 지나치면 욕이라고"했더니 머쓱한지 "난 내가 그렇게 말하면 모두가 자네보고 아니다고 극구 부정하며 젊어보인다 할줄알았지.차~암 복잡하게 사는 이런 영감, 지 혼자 신사의 품격을 갖춘줄 착각하는 미련골통에는 어떤 약이 필요할까요? 유 기자님의 조언을 꼭 듣고 싶습니다.

  7. 빗소리 2012.08.16 12: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고 싶은 유기자님
    어제 라디오에서 목소리는 들었습니다
    목소리만으로도 반가웠어요
    유기자님은 영원한 숙녀~~~~

  8. 기원섭 2012.08.18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유기자님이 만나준 남자 가운데 하나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유기자님으로부터 '신사'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끔,
    오늘부터 내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 맬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