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 프로듀서를 만났다. 그는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다>란 책을 25일에 펴낼 예정이란다. 그 제목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50대 후반인데도 영원한 소년의 미소를 가진 그는 요즘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사직공원 옆의 집에서 출발해 광화문, 정동을 거쳐 걸어가는데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항상 몇분간 머무른다고 했다.

 

“교회 앞에 예배 일정과 더불어 그날의 설교 제목이 적혀 있거든요. 어느날은 ‘믿음과 내려 놓음’,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설교 제목의 하나가 ‘너무 어려워서 감사합니다’였어요. 그 제목만으로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감사하다니... 나도 곰곰 생각해보니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우리의 인생은 매일 하나님이나 신이 내민 시험지처럼 어렵기만 하다. 무엇하나 쉬운게 없다.아침에 일어나 오늘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문제부터 점심 메뉴 정하기, 돈문제, 동료와의 관계 등등 단 한가지도 만만하거나 쉽게 풀리는 게 별로 없다.

 

모처럼 봄옷을 입고 나갔는데 꽃샘추위에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친구에게 해준 조언을 친구가 고깝게 받아들이기도 하고 소문난 식당을 찾아찾아 갔는데 그 날이 정기휴일이고... 정말 사소한 일상에서도 도처에 지뢰밭이다.

 

주철환 피디는 이렇게 말했다.

 

“50여년을 살아본 경험으로는 인생은 어려워야 하는 것 같아요.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쟎아. 어려운 문제를 풀어봐야 실력도 늘고 도전의식도 생기거든요.”

 

우리는 매일,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정말 난관에 처할 때가 많다. 내 말과 행동이 오해를 받기도 하고,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한다. 차별도 당하고 억울한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기도 하고, 수렁에 잠시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은 또 다른 길을 내준다.

 

주 피디는 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요즘 이영자씨가 제2의 전성기라고 하쟎아요. 나는 영자씨가 체중감량을 하면서 물의를 빚어 기자회견하던 장면도 생생하게 기억하거든요. 그리고 몇년간 침체기를 맞아 어려웠던 시절도 알고요. 최근에 다시 실력을 발휘하는 영자씨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세상이 너를 등지면 세월이 너를 안아줄 것이다... 영자씨를 비롯해 시련을 이겨낸 이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맞다. 나도 세상이 나를 등진다고 세상과 타인을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 매일 내게 주어지는 시험지와 숙제가 너무 많고 너무 어려워서 도무지 숙제나 시험지의 출제 의도조차 파악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시험지를 찢어버리고 싶고, 백지 시험지를 던져놓고 시험장을 떠나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숙제를 해냈다.

어려운 시험 문제를 낸 출제자의 심술(?)을 원망하고,  내 실력의 부족과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 타고난 열악한 유전자, 시험보는 날의 운세 등등까지 탓했지만 시험지나 숙제를 던져 버리지 않고 껴안았다.

 

때론 어려운 문제를 차분하게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쉬운 문제를 대충 풀었을 때와는 차원이 전혀 따른 뿌듯한 충일감을 느꼈다. 내가 조금은 성장하고, 내 뇌만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단단해진 것 같았다. 혼자 시험지를 붙들고 끙끙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주철환 피디의 말처럼, 내가 아니라 세월이 그 문제들을 정리정돈해주기도 했다. 내 문제만 아니라 나에 대한 평가도 그랬다.

 




50대 중반인 지금도 난 매일이 어렵다. 스마트폰의 그 다양한 기능을 익히는 것도 어렵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어렵고 내 몸인데도 100그램의 체중을 빼는 것도 어렵고 내 딸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주기도 어렵고 난해한 청탁을 거절하기도 어렵고 이 나이에도 싫어하는 사람을 안 싫어하는 척 하기도 어렵고 늘 혀를 깨물려고 노력하지만 남의 흉을 안보기도 어렵고 지인들의 성공과 출세에 사심없이 축하해주기도 어렵고 내 나이에 맞게 우아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목사님의 기도 제목처럼 어려워서 감사하다. 너무 어려웠기에 난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아내야 했다.
야비한 인간들의 모욕도 느긋하게 견뎌내고 미로같이 출구가 막막한 곳에서도 침착하게 길을 찾으려 노력했고 절대 안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물론 앞으로는 더 난이도가 높은 시험지가 내 앞에 펼쳐질게다. 수준과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들을 풀어내야 한다.
 
내 딸이 데려온 남자를 사위감으로 인정해야 할지 말지, 정년을 채워야할지 먼저 사표를 던져야할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넓혀야할지 말지 노년기에 새로운 일에 도전할지, 조용히 살지  죽음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지, 혹은 장례는 화장이 나은지 수목장이 나은지 등등...

 

그래도 감사할 일이다. 매일 새로운 시험지와 숙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말이다.
 
인생이여, 어려워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 제목을 알려준 주철환 피디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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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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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다 2013.03.18 19: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힘들때인데
    답을 주시는군요.
    어려워서 감사합니다.
    힘든 고비 넘기면 한층 성숙해진 나를 만날 수 있을 터니이
    말 그대로 어려워서 감사합니다

    • 유인경 2013.03.21 14: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다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어려운 시험, 부담없이 잘 푸시기 바랍니다.
      겨울가고 봄이 오듯 분명히 평화로운 시간이 올거에요.

  2. 이수경 2013.03.22 1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
    이렇게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용기를 얻고 돌아갑니다.

  3. 보리 2013.03.23 1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 오십 넘어서는 첫날입니다.
    따뜻하고 현명한 선배로 부터
    먼저 이 고개를 넘어서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을
    좋은 충고를 선물로 받은 기분입니다.
    계속 '건필'해 주시길. 기자님이 어려운 숙제를 해 줄때마다 위로받는 영혼이 늘어납니다^^;;

  4. 가을 들 빛 2013.03.24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잠깬 새벽에 좋은 글 읽었습니다.

  5. 기원섭 2013.04.04 1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격려가 있고
    극복이 있고
    그래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지펴지는 곳,
    그래서
    나는 이곳 유인경 기자의 '수다의 힘'을 들락날락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