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나는 내게 여행을 보내 주려고 했다. 1982년에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해 중간에 3년 정도 전업주부로 쉬긴 했어도 사회 생활 30주년이어서 뭔가 내가 직접(?) 선물을 주고 싶었다. 박완서 선생이 돈을 투자한 것 가운데 가장 가치가 높은 것이 여행이라기에 여행을 가려했다. 나 혼자 떠나는 온전히 나를 위한 여행말이다.


여행을 결심한 후 내 머리 속에는 온갖 나라와 도시와 거리들이 방방이 불을 켰다. 파리, 뉴욕, 에게해, 이탈리아 토스카나, 스페인 바스크 지역, 일본의 홋카이도, 하와이의 섬들, 터어키와 모로코 등등 온갖 지역들을 살펴보고 마음속으로는 수백번을 다녀왔다. 


당연히 험준한 오지는 열외였다. 그건 한비야씨처럼 훌륭한 전문가들의 몫이고 나는 쾌적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곳을 원했다. 조영남씨는 “난 신이 만든 것에는 관심이 없어. 산이며 호수 등 얼마나 근사하고 완벽하게 만들었겠어. 난 그저 사람들이 만든 것에 관심이 많아. 인간들이 건물은 얼마나 잘 만들었나. 구두나 시계는 또 어떻게 만들었나. 여행을 가면 인간이 만든 물건을 보러 갈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난 자연에도 관심이 많고 자연에서 치유를 받고 싶기도 했다. 


지인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어떤 지역이 좋을까. 어디가 근사하고 매력적일까...

그런데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나는 운전을 못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했다. 택시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가능한 곳이어야지 내 나이와 건강과 안전을 생각할 때 시골은 힘들 것 같았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서 머무는 것은 어떨가. 나도 20, 30년전에는 그랬는데...”


나의 이런 말에 친구들이 모두 만류했다.


“아니 그 나이에 무슨 사서 고생을 하려 그래?  트렁크를 들고 지도 펴들고 다니다가 소매치기나 집시, 강도라도 만나면 어쩌려구? 아무리 짐을 줄여도 힘들거야, 맨날 어깨 아프다고 징징거리면서...” 


좀 더 로맨틱하고 나를 과대평가(?)하는 친구는 이런 조언을 했다.


“음, 꼭 혼자 가야해? 기사를 대동하면 되잖아. 기꺼이 너를 위해 여행지에서 운전을 해줄 사람을 구해 같이 가거나, 아니면 현지에서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 나왔던 젊은 시절의 브래드 피트같은 잘 생기고 운전 잘 하는 남자를 만나는 거야. 그야말로 로드 무비를 한 편 찍는거지.”


혹은 나를 아주 럭셔리하고 부유하다고 착각한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뉴욕의 브루클린  지역이 뜬다쟎아요.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뉴욕 5번가나 소호에 호텔 정해두고 하루에 한 거리씩 찬찬하게 보는 거에요. 아니면 일본 요칸 여행은 어때요? 가루이자와의 호시노야나 유후인같은 리조트나 교토의 전통적인 요칸에 가서 주인이 아침에 차려내는 가이세키 요리도 음미하고...”


물론 나도 그런 여행을 하고 싶다. 브래드 비트건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건 꽃미남 기사를 대동해 우아한 자동차 기행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 또 방값이 하룻밤에 고작 몇천달러 밖에 안하는 뉴욕 맨하튼의 호텔에서 느긋하게 뉴욕의 야경을 즐기고도 싶고, 하루 숙박비 200만원 정도의 요칸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주인이 무릎 꿇고 내미는 밥을 받아 정갈한 일본 요리를 음미하고도 싶다. 


<꽃보다 할배> 캡처


그런데 나를 대신해 운전할 꽃미남을 찾기는 비현실적이고 그런 곳에 1주일만 다녀와도 나의 반년치 생활비가 휘리릭 날아가버린다. 환갑도 아닌데 그러기엔 좀 부담스러웠다. 또 지난해엔 아침 방송에 고정 출연했고 이런저런 일로 1주일이나 열흘 정도의 시간을 빼내기가 힘들기도 했다. 다 핑계이긴 하지만 난 여전히 현실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드디어 올 여름. 난 꿈을 실현한다. 약간 수정이 된 계획이다. 나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간다. 마침 딸 아이가 파리 소르본대학원에 합격해서 딸 아이의 무거운 짐을 들어다 주러 간다는 핑계로 내친 김에 여행도 하기로 했다.


일단 딸의 입학 시기에 맞춰 시간을 도려 냈다. 그 어떤 중요한 일이 들어와도 거절했다. 자동차를 빌려 남편과 딸과 함께 이탈리아 베니스, 플로렌스, 베로나, 시에나, 카프리, 아말피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가 본 곳도 있고 안가본 곳은 더욱 많다. 


가장 기대되는 곳은 미지의 장소보다 30년전인 1983년에 처음 혼자 가봤던 로마이다. 첫 직장에서 첫 해외 출장지로 떠난 유럽에서 로마에 갔을 때의 문화척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 <로마의 휴일>이나 <여정>에서 봤던 스페니시스텝 등 영화 세트같은 장소들, 허름한 가구 공방도 물어보면 수백년 역사가 있는 곳이고 수시로 뜯어 갈아엎는 보도 블럭이나 아스팔트에 익숙한 내게 천년전에 다져진 길은 정말 경이로왔다.


로마의 나보나광장


로마의 트레비샘



내게는 30년이란 세월이 정말 아득한 세월이다. 이십대 초반의 신입사원이었던,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플레어 스커트 차림으로(거짓말이 아니라 그땐 정말 나름 잘록했다 ㅠㅠ)  눈망울을 반짝이던 아가씨가 이젠 두루뭉술한 몸매에 산전수전 다 겪은 아줌마가 되어 로마를 찾는다. 그것도 다 큰 딸을 데리고.


수천년 역사의 로마에게 30년은 그저 눈 한번 까딱한 시간조차 아니겠지만 난 이번에 로마를 찾아 20대의 나를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어도 꿋꿋하게 버텨 아직까지 무사한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지치면 쉬고, 배고프면 피자나 파스타를 먹고, 목마르면 목을 축이고 올리브나무나 포도나무 그늘에서 낮잠도 즐기고 노세노세 하고 싶다.


그 기간동안은 노트북, 인터넷 등도 다 무시하고 책도 별로 안 읽고 빈둥거리며 다닐 생각이다.

머무는 곳에 볼만한 음악회나 행사가 있으면 참석하고 고급 레스토랑보다 동네 식당을 찾아갈게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급속히 변하지만, 그걸 내가 다 파악하고 따라갈 수도 없고

한국 정치나 경제계도 나 없이도 너무너무 잘 돌아갈테고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보름 정도 안 봐도 줄거리에 큰 지장이 없을테고

우리 신문사의 기사들은 더 품격이 높아질테고

내 친구들도 더 평화롭게 지낼게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30년만의 휴가를 즐기면 된다.


예전같으면 그 휴가 기간 동안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에 대해 살짝 죄책감도 느끼고

주말에 들어온 강의료를 못벌어 은근히 속이 쓰리고

이왕이면 더 알차고 실속있고 보람찬 스케쥴을 짜려고 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여러분, 이제 무작정 떠납니다.  나는 노세노세할 권리가  있다. 

늙어지면 못노나니가 아니라 늙어서도 노세노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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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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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네 2013.08.26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브라보~~~~!!^^

  2. 부산댁 2013.08.27 1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의 꿈입니다 ^^*

  3. 리다 2013.08.27 18: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행 계획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저까지 가슴이 설레네요
    선생님 글이나 책은 많이 읽었지만 텔레비젼에서 뵌 건 며칠 전이 처음이었어요.
    "아름답게 나이 들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아라"
    헬스크럽에서 러닝머신하면서 본 거라 잊어버릴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안 잊혀지네요
    즐겁고 안전한 여행 되시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4. 문수정 2013.08.28 0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행복한 여행 잘 다녀오세요...따님의 대학원 합격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5. 이환 2013.08.28 0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놓세 놓세 젊어서 놓세
    늙어지면 못 놓나니...

    속으론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론 안 그렇다니...
    그맘 알죠!
    대접 받고도 싶죠
    그 대접은 부엌 살강에서나 찾으라 합시다

    100에서 이제 55 정도 왔어요
    인생을 아는 것도 그만큼
    45! 아직 모르는 것, 알아가야 할 것들
    쌓여 있습니다
    안주하지 말고 늘 새롬을 찾아요, 우리

    같은 또래가

  6. j2j 2013.08.28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강하게 잘 다녀 오십시요.
    그동안 대한민국은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참 부럽네요...

  7. 좋아요 2013.08.28 08: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아주 잘하신 결정이에요. 느긋하고 행복한 여행되시길 바랄게요.

  8. 정덕인 2013.08.28 2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0이 가까운 중 노인입니다.
    제가 어디가서 신명나게 놀때 항상 이 노래를 부르지요.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답니다.

  9. 고수부지 2013.08.29 0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즐거운 여행~잘댕겨오세요^^

  10. 이필규 2013.08.29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기자님 참 아름다운 마음이시고요, 떠나자 마음먹으면 무조건 떠나는 것이 좋아요
    조금 다름 이야기인데 TV에서 초대손님으로 참가하셔 말씀하시는 내용이 모두 모두 맛갈납니다

  11. 신무기 2013.08.31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 여행 계획이 즐거워 보이네요
    스케줄이 뻭뻭하실건데.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저는 아들이 로마 에서 근무한 덕분에 두번이나
    가는 행운을 얻었지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제가 다녀온 곳이 소개되면
    정말 반갑데요.
    베네치아,곤돌라 속에서 한국학생들을 만나니 진짜 반가워서 손을 잡아주었고.
    센강 유람선에서 우리나라 말로 안내하는 소리를 들으니 야!! 참 우리나라도 대단하구나 하는
    자부심이 들드라구요.
    기자님은 저히들 보다 훨씬 사물이나 역사를 보시는 안목이 깊으시니 이번여행에 정말 많은
    수확이 예상됩니다.
    건강하게 잘다녀오시길 기원드립니다.

  12. elle 2013.09.01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행복한 여행을 계획하고 계시네요.
    이탈리아..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이번에 가시면, 저는 cinque terra를 꼭 추천합니다.
    피렌체에서 차로 4~5시간 걸리는 좀 먼 곳이지만 꼭 가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이틀쯤 묵으세요. 평생 기억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겁니다.
    책도 읽지마시고 이메일도 되도록 체크하지 마세요.
    그냥 머리를 텅 비우고, 나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에 푹 빠졌다 오세요.
    Bon Voyage!

  13. 홍여사 2013.09.01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럽네요.
    잘 다뇨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