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누가 내게 실수를 했다.

 고의로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실수가 내게 치명적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기분이 좋을턱은 없었다. 그 정도로 변태는 아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당사자에게 웃으면서 “아유, 괜찮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 신경쓰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사람이 모임 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인경씨. 아까는 분명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지적했어야 해요. 그런데 인경씨가 오히려 실수를 한듯 지나치게 겸손하게 괜찮다, 걱정말라고 하더군요. 신경질이나 화를 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실수를 지적해줘야 그 사람도 다시는 그런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테고, 인경씨도 그런 대접은 받지 않는다구요. 

사람들은 참 단순해서 그 사람의 진실하고 겸손한 인간성에 감탄하고 찬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만하게 봐요. 그리고 당치도 않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들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들어준다니까요.“


 나는 명랑하고 소탈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다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

 내 주장도 잘하는 편이고(특히 회식에서 먹을 것을 주문할 때)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무례하게 구는 모습을 보이면 직설적으로 지적도 한다. 

 다만, 남들이 내게 보이는 무례함이나 무신경에는 나도 비교적 무신경한 편이라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신경이 거슬리지 않으니 당연히 화를 내거나 무례함을 나무라지도 않는다. 약속 시간에 늦게 나와도 별로 화가 나지도 않고, 지나친 요구를 해도 ‘이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런 부탁을 하나’란 생각보다는 ‘내가 능력이 되면 도와주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그게 편해서다. 그런데 나의 그런 태도가 결국 다른 이들이 나를 만만하게 띠엄띠엄 보게 만드는 점이라니...


 기업체의 한 간부는 이런 사례를 전했다.


 “유명 여성 방송인을 강사로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행사 진행하느라 신입 사원이 의전을 맡았어요. 그리고 음료수를 드렸더니 자기는 절대 컵이나 병으로 안 먹고 반드시 스트로를  사용한다면서 스트로를 요구하더군요. 음료수 역시 사전에 우리에게 특정 브랜드를 주문했구요. 귀빈접대실이 없어 그냥 대기실에 모셨는데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접대를 소홀히 한다구요. 나중에 우리 회사 사장실로 직접 전화를 걸어 머리나쁜 신입사원을 잘르라고 까지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사장님께 불호령을 들었지요. 모 교수도 앞의 행사로 강의시간이 30분 정도 늦게 시작된다니까 ‘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이런 진행을 하냐’며 소리지르고, 가겠다고 난리를 친 적도 있어요. 겨우겨우 설득해서 무사히 강의는 했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그렇게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 줍니다. 물론 다시는 안보고 싶은 사람들이죠.


‘난 소중하니까요’를 주장하는 것은 자유의지다. 하지만 자신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타인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심지어 직장에서 사퇴를 권고까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일러스트 : 김상민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과대망상에 가까울지라도 자신에 대한 과도한 대접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 사회가 관대한 편이다.

여왕이나 공주가 아닌데도 “이 무수리들아. 어서 내가 가는 길에 꽃을 깔아라”라고 하면 저절로 고개를 숙여 꽃을 뿌려준다. 반면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무수리처럼 물을 나르고, 걸레를 집어 들어 마루를 닦으면 칭찬은 커녕 “구석구석 닦아야지, 왜 저긴 안 닦았냐”란 비난을 듣는다. 궂은 일은 항상 그런 이들의 몫이다. 한 작가는 신입 여사원에게 “절대로 먼저 걸레를 들지 말아라. 그럼 평생 걸레만 든다”는 충고를 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팔랑개비 귀인 나는 잠시 갈등을 느낀다.


“나도 당당하게, 우아하게 나를 대접하라고 주장해야 할까. 내가 도착할 무렵에 건물 앞에 도열해 있으라고 하고, 음료수는 특정 브랜드를 주문하고, 과일이나 쿠키 등 간식도 종류를 지정할까. 혹은 그곳에서 차와 기사를 대령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걸까. 그럼 절대 나를 무시하지 않고 여왕처럼 떠받들어줄까?”


그러나... 난 여왕 노릇이 불편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콜라나 커피믹스고 쿠키도 마트에서 파는 뽀또나 웨하스가 입맛에 맞다. 누가 나를 영접하러 나오면 몸둘 바를 모르겠고 기사분이 모는 자가용을 타면 침묵을 유지하기도, 수다를 떨기도 대략 난감이다. 난 그냥 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편하다. 정말 타고난 무수리 체질이다. 젠장.


중요한 것은 한결같음이 아닐까.

여왕 대접을 요구하는 사람이 진짜 대통령이나 실력자 앞에서도 여왕처럼 당당할 수 있다면 그가 진정한 여왕임을 인정하겠다. 항상 막말을 하는 사람이 권력자 앞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개성이라고 생각하겠다. 

대부분의 이들은 여왕 코스프레를 하며 오만함과 교만함으로 무장했을 뿐이다. 아마도 자신의 속이 허하기에 그토록 허세를 떠는지도 모른다. 막말을 하는 이들은 내세울 것이 없으니 큰 목소리와 독설로 일단 분위기를 제압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젠 나를 무시하지 마!”를 주장하며 태도를 바꾼다면, 나를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비난이 쏟아질게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상황이 불편해서 당장 머리에 쓴 왕관을 내려 놓고 손에 걸레를 들 것이다.

물론 나이에 맞는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갑자기 나를 존중해달라고 하는 것은 코미디같을게다.


하지만 또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그 사람의 인품은 도도함이나 당당함보다는 겸손에서 빛나는 것 같다.

겉으론 신사처럼 보여도 식당 종업원이나 자기 기사에게 막말을 하는 사람을 존경할 수는 없다. 아무리 유능해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을 존중하기 힘들다. 청문회나 국정감사에서는 장관이나 관료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국회의원들도 역겹다. 차분하게, 팩트만 말해도 되는데 말이다. 그리곤 자기가 필요할 때는 “아이구 장관님, 저 올씨다요”를 외친다. 


[장도리]2013년 7월9일(출처 :경향DB)


오십대 중반의 내게 필요한 것은 여왕 대접 요구가 아니라, 더욱 더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한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낮아지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이 인격을 존중해주고, 남과 내가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어린 아이의 말에도 경청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에 자랑이나 생색을 내지 않아야 한다. 아직은 수양이 덜 되어서 누가 나를 부장이라고 부르면 속으로 “어머, 부국장된게 몇년 전 인데”라고 서운하기도 하고, 수시로 딸에게 “내가 사준 거 예쁘지, 역시 엄마지?”라며 생색을 낸다.  

 아, 천상 무수리 체질인 내게도 겸손은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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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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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수경 2013.11.26 15: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핫 ^^ 겸손. 기자님 최고!!!!! ^^

  2. 감추사 2013.11.26 15: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옳소! 질소!이산화탄소! 정말 지당하신 말씀, 식당종업원에게 막말하다가 높은분 나타나면 갑자기 허리꺾고 굽신대고 그런 모습보다는 한결같은 친절함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꼬마의 인사도 정중히 받아주고 친절과 칭찬을 베풀어봅시다.

  3. 가을 2013.11.26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상적인 말씀..감사합니다

  4. 리나 2013.11.27 14: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각해서 배려해주고 좋은 말 해주면 더 만만하게 보고,
    칼 같이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기 정말 힘들어요 ㅠㅠ
    유인경님은 남들의 무례함 앞에서 무신경하실 수 있고,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으신다니
    제 입장에서는 그 내공이 엄청 부럽습니다.
    저는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자꾸 예민해져서 스스로 괴롭거든요...
    저와 맞는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살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성 없는 얘기이니...
    저 스스로 내성이 강해지려고 엄청 노력하는 중입니다.

  5. 순자 2013.11.27 19: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겸손도 습관인것 같아요. 그리고 그 습관이 나의인격을 만들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잰척하고, 척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얘기는 못들어 본것 같아요.
    유기자님, 힘내세요. 우리가 좋아합니다.

  6. 호산나 2013.11.28 1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새 제가 하는 생각과 똑같아요. 인간에 대한 예의. 누구나에 대한 친절과 당당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오는데 조심하시고.. 아.. 운전 안하시죠.. 건강하세요~^^

  7. 미소아줌 2013.11.28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귀여운 유기자님^^*
    정말 정말 동감합니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 행복하게 잘 보내시길....

  8. J2J 2013.11.28 21: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씨가 몹시 추워졌는데 좀전 제 동생이 상암동에서 뵜다고 하기에
    건강하시라고 한 마디 올렸습니다.

  9. 명동DJ 2013.11.29 0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칠흑처럼 어두운 밤 입니다.
    하지만 이내 새벽이 밝아오고 먼동이 트기 시작 할 것입니다.
    이 땅,
    권력에 눈이 어두어 추악하게 헤메는 불쌍한 사람들이
    유인경기자의 만년설 정수처럼 맑은 글을 접 해 하루속히 깨닫기를 고대합니다.
    이 한 밤 곤히 잘 주무시길 바라며..

  10. 에벤에셀 2013.11.29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난 이정도면 겸손한 사람이다 싶다가도 내가 말하기 뻘쭘한걸 상대가 몰라주면 속상하드라구요 ㅋㅋㅋ
    어떤순간에도 침묵할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유인경기자님 동치미보다가 팬되었어요 반갑습니다~~ *^^*

  11. 이성수 2013.12.01 00: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겸손과 용서는 실천한다는 생각...
    이미 그 것들과는 가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을 보세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껴집니다... 누구나.

  12. 진수 2013.12.01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선생님 동치미 넘재밌으셔요 도도해보이시는데 소탈하시고 인간적인모습이 넘보기좋아용 ㅋ

  13. 재민엄마 2013.12.03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선생님~~왕팬이에요~~
    선생님의인간적인모습에반했어요~~
    항상건강하시고행복하세요~~
    선생님때문에동치미빠지지않고시청하고있어요~~화이팅~~♥

  14. 정선생 2013.12.04 2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영남의 "겸손은 힘들어"란 노래를 엊그제 방송에서 들었는데
    재밌는 가사다 하면서 일말 수긍이 가더라고요.
    그런데 오늘 유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참으로 느끼는바가 큽니다.

  15. 임 순 2013.12.05 09: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자리에서든지 있는듯 없는듯 그렇게 지내면 편하거라구유~유 인경기자님 옛날이 그리워지네유~아무조건없이 유 인경기자님 집에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에서 올라와서 수다방식구들이 번개팅했잔어유~동치미 열씨미 잘 보구 있시유~^^

    • 바이올렛 2013.12.05 2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광주에서도 갔어라우~~~ㅎㅎ
      유기자님의 겸손은 티 안나는 포근한 겸손이지요!!

  16. 바이올렛 2013.12.05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아이 낳고서 ,아기의 박자 따라 사느라 나는 없고 의기소침허니 살 때에 한밤에 이문세를 보며 누운 채로 기뻐 날 뛰던 기억이납니다.
    중학생때 밤늧도록 카세트 틀며 듣던 그 노래를 어찌나 활기차게 1그람도 안바뀐 모습으로 불러주던지~~~완전히 행복했습니다^^
    유기자님 나의 대장님도 10년 전과 똑 같은 모습으로 동치미 수다를 떨어주시니, 우리가 같이 순댓집에 앉아있는 것도 같고 귀여우신 배우자님과도 같이 하는 듯하여 즐겁습니다~~
    땡큐 베리망취♡♡

    • 임 순 2013.12.13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바이올렛이 누구시더라 유기자님 집에서 번개팅할때 만났던 예지엄마인가유~반가워유~^^

    • 임 순 2013.12.13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지엄마아니구 이지엄마넹~그때 생새우 맛나게 잘 먹었시유~ 우리언제 번개팅해야죵~^^

  17. 프라두 2013.12.06 09: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백배^^

    살면서 남이아닌
    아들에게 딸에게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사는거 같아 더욱 슬포지는 하루입니다.

  18. 기원섭 2013.12.07 14: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세상을 참 웃기게 삽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논리로 산다는 거지요.
    그런 논리 두 개만 예를 들게요.
    시아버지인 제게 툭하면 잘못했다고 하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내게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마라. '잘못'이란 고의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너는 이 시아버지를 상대로 일부러 그럴만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겨우 '과실'일텐데, 그런 과실은 본의 아닌 것이어서 '잘못'이라고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덧붙여서 '미안합니다.'라거나 '죄송합니다.'라거나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미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큼 아는 네가 한 짓은 다 그 이유가 있다고 믿을 테니, 앞으로 내 앞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리고 혹 네가 그 말을 하기가 싫어서 손녀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봐 도리어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만났다 하면 말싸움이 끝이 없는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마음 아파하는 내게,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하는 교회 집사인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저 기도만 하면 될 것이라면, 십자군 전쟁은 왜 일어났겠냐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친구인 네가 현실적으로 그 친구를 설득해서 나와 다투지 않게 해주거나, 나를 설득시켜서 내가 그 친구와 다투지 않게 해주는 것이야.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라니? 그것은 네가 내 친구이기를 포기한 거야."
    참 이기적이죠.
    겸손하지도 않고요.
    그죠?

  19. 소정이 2013.12.14 0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봅니다.
    기자님 글도 좋아하고 동치미 방송도 잘 보고 있어요^^
    기자님글도 동치미 같아요^^ 무겁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은 .... 시원하면서도 순간 코끝을 톡 쏘는, 그래서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매력 때문에 중독성이 있거든요 공주과든 무수리과든 한결같음이 중요하다는 말 격하게(?) 공감합니다
    강한 내공이 깔린 겸손함은 지혜로움이겠죠 기자님은 지혜로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