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니 돈 쓸 곳이 많아졌다. 

 올해는 온가족이 치과 치료를 하느라 병원비도 왕창 나갔고, 유난히 지인들의 결혼식과 상가를 방문할 일이 많았다.

 경조사비 외에도 나이가 드니까 따뜻한 모피에도 눈길이 가고 비닐이 아니라 가죽, 그것도 양가죽 부츠를 신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알량한 월급과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본의 아니게 검소해진다.


 눈이 내려도 “아,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다”란 로맨틱한 감상보다는 “저 눈이 돈뭉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졸렬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돈이 많으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까. 돈이 많다는게 행복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 방송에서 강용석 전의원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


“정몽준 의원이 참 안됐어요. 국회의원 중에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부자인걸 다 알쟎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구두쇠다, 짠돌이다라고 하거든요. 짜장면같은 걸 사주면 ‘부자라면서 더럽게 짜다’라고 비난하고, 비싼 음식을 사줘도 ‘뭐 누군밥값이 없어서 얻어먹나, 유세를 떨기는..’ 등 뭘 사줘도 욕을 먹거든요. ” 


정의원의 아버지 정주영 회장은 재벌 1세인데다 당시 시대가 근검절약의 시대여서 와이셔츠를 목부분만 덧대어 입거나 구두창을 몇번이나 갈아신는 것이 미덕이었다. 하지만 재벌2세가 너무 절약하면 “저런 사람들이 돈을 안 쓰니까 동맥경화가 아니라 돈맥경화가 생기는 거야”란 비아냥도 듣는다. 정몽준의원이 밥을 사면 고마와하기는 커녕 어떤 메뉴건 지적질을 받는다니 본인은 좀 억울할 것 같다. 그래서 안사게 되고, 안사다보니 짠돌이 소리를 듣고... 음... 


전주 남부시장을 방문하여 상인들과 함께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는 정몽준(출처 : 연합뉴스)


얼마전에 만난 지인은 어느 재벌2세 여성이 불쌍하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국내 굴지의 대기업 딸, 명문대 출신에 외모도 그럭저럭,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가사를 돕는 도우미도 여러명, 부모 덕분이긴 하지만 대기업 간부인 그녀는 전생에 우주를 구한 것같은 축복의 대상이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느껴질 정도라니 의아했다.


“돈만 많으면 뭘해요. 말이 재벌 딸이지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더라구요. 혹시라도 ‘오너 딸이 머리가 나쁘다, 무능하다’란 비난을 안들으려고 정말 애를 써요. 직원 눈치보다 부모 눈치봐야하고, 형제들과의 경쟁도 얼마나 치열한데요. 당연히 명품만 쓰고 럭셔리한 삶을 살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정서상 ‘사회지도층’이란 면류관을 쓰고 있으니 샤넬, 루이비통 등 다 아는 브랜드도 못입고 안들어요. 친구도 없죠. 누가 호감을 보이거나 가까이와도 ‘혹시 내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란 경계심을 갖더군요. 누가 잘해줘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구요. 항상 뼛속깊이 외로워하는게 느껴져요. 어느날 와인잔을 마시고 울면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고 하는데, 내 가슴이 아프더라니까요.


난 내 돈을 노리거나 지위, 혹은 미모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늘 무장해제되어 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우선은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돈이 너무 많으면 나같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기꺼이 돈을 내도 될 자리에도 “내가 봉이야? 내 돈은 공공기금이야?라며 아까와한다. 혹은 ”난 정말 훌륭하고 멋지고 완벽한 사람인데 내 재능과 인품은 살피지 않고 오로지 내가 가진 돈으로만 날 평가한다“고 억울해하는 것 같다.


재벌2, 3세의 경우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홀연 ‘실장님’ ‘본부장님’이란 타이틀을 달게 된다.

타고난 유전자에 경영 능력도 있을테고, 당연히 좋은 학교에 해외유학 등 스펙도 훌륭할테지만 조직 생활이 어디 그런가.

후배들에게 너무 겸손해도 무시당할까 두려울테고, 너무 권위적이면 오너라서 그렇다고 욕을 먹는다. 

직장인들의 즐거움이자 권리(?)는 상사를 자근자근 씹고 욕하는 것인데, 그들의 상사는 부모, 대부분 아버지이니 아버지를 대놓고 욕할 수도 없지 않은가. 회사에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직장에 다니지 않은 재벌2세나 그 부인들도 마찬가지다.  한 재벌가 부인은 매일 시어머니, 시고모, 시누이, 동서들과의 약속이나 행사 참여, 집안 대소사 잔일하기 등으로 하루 24시간이 바쁘다고 했다. 지금은 현대그룹의 회장이지만 한때 주부였던 현정은 회장은 며느리 시절에 다른 며느리들과 함께 매일 새벽 5시에 청운동 본가에 가서 시부모 아침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집안이나 형제간 다툼이나 고부나 동서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게 돈, 엄청난 재산이 관련되면 피도 눈물도 없어진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화려한 저택, 수천만원짜리 침대와 억대의 샹들리에로 장식된 집안에 산다고 행복할까. 어쩌다 어마어마하게 값비싼 앤틱 가구로 장식된 집에 초대받아가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 몇년전에 재벌들이 주로 투숙하고, 패션디자이너 샤넬이 만년을 보낸 파리의 리츠 호텔에 초대받아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헤밍웨이 등 명사가 투숙했던 방에는 아프리카, 중동 등 온갖 나라에서 가져온 고가의 가구와 소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망치손이어서 손만 대면 깨뜨리고, 수시로 넘어지고 물건을 잘 엎어뜨리는 나는 그날 밤, 정말 화장실을 가는 것도 조심조심 가느라고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실수로 깬 그릇이 수억대면 어쩌란 말인가. 그 호텔에 볼모로 잡혀 화장실 청소를 할 수도 없고...


여행을 가도 호화 크루즈도 좋고 미슐랭 별 세개의 식당도 좋지만 허름한 식당, 그 지역의 풍미를 담은 노천카페, 아기자기한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는 것이 더 매력적이 아닐까. 


무엇보다 난 짜장면 하나를 사줘도 감사해하는 후배나 친구들, 내가 준 싸구려 액세서리에도 격하게 고마와하는 친척들 덕분에 평화롭게 지낸다. 내가 부자가 아니니까 상대도 기대를 하지 않고 기대를 하지 않으니 당연히 실망도 안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소박한 행복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일생에 한번쯤은,

“나 애인이 생겼어. 미안하지만 이걸로 마음을 달래”라며 건네준 남편의 돈과 카드로 마구마구 쇼핑을 하고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더라도 비닐장판이나 온수매트 위가 아니라 최고급 이탈리아 소퍼에서 눈물같은 진주 목걸이를 휘감고 울고. 내 딸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남자에게 “자네 설마 우리 돈을 보고 그러는건 아닌가? 당장 꺼져!”라며 물을 한번 끼얹어 주고 싶다. 

아, 요즘 내가 막장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유인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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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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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벤에셀 2013.12.11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
    인간적이고 시원시원한 입담에 재밌게 읽고갑니다.

  2. 존재기쁨 2013.12.11 1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치미 출연료가 시원치 않으시나..ㅋ
    그래도 쫌 가진 친구가 폼 안잡고..만나면 알아서
    술값 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저도 그러고 싶어서 엄청 노력햇는데..
    돈은 맘대로 안돼더군요..
    맘대로 안되는 인생..뭐 그려려니 하고
    즐겁게 살아야죠...
    참..유기자님이 연속극 대본쓰면 잘쓸 것 같은데..
    도전해보시기를..아무래도 막장드라마..대가인 임성한 인가하는
    작가보다 못쓰겟어요..돈 엄청 준다고 줄서있다는데요..ㅎㅎ

  3. 리나 2013.12.11 2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이 없으면 마음 아프고 자존심 상할 일이 많아요.
    오늘 낮에도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엄청 상했죠.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근본 원인 중에 하나는 나에게도 있기에 마음을 다잡긴 하지만,..

    이 글에 많이 위로 받고 갑니다.
    글 마지막에 넋두리처럼 쓰신 글은 저의 속마음이기도 하네요 ㅎㅎ
    94년을 추억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순수함의 끄트머리라도 붙잡을라구 발악하는 요즘이에요 ㅋ

  4. 고수부지 2013.12.12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요~요즘 재미난 드라마 너무 많지요?
    따뜻한 말한마디랑 응~~4 맏이 꽃보다누나 세결여까정~ㅎㅎ

  5. 이주호 2013.12.12 1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 기자님의 글을 항상 기다리면서 잘 읽고 있습니다. 유인경 기자님의 글에서는 단순함과 솔직함이 함께 어울어져 항상 읽는 내내 즐겁고 한번씩 내 자신에게도 솔직한 질문을 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6. 기원섭 2013.12.12 14: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0여년 전, 제가 말단 수사관 시절의 일입니다.
    친구 하나가 밥을 사주겠다고 왔어요.
    무슨 부탁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허구한 날 밤를 지새다시피 수사에 몰두하는 저를 위해 그저 수고한다면서 보신 좀 시켜주려고 등심 사줄 생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조건을 걸었어요.
    동료직원 다섯을 동행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어요.
    잠깐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여주더라고요.
    그리고 점심 먹으로 가면서 우리 둘 나눈 대화가 이랬어요.
    "좀 부담 돼지?"
    "아니야...그 정도는..."
    "아니야가 아니야. 당연히 부담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장소를 옮겨야겠어?"
    "어디로?"
    "된장찌개 집으로...참 맛깔나게 하는 집이 있거든."
    "아니, 나는 너를 보신시켜줄 생각으로 왔으니, 등심구이 집을 가자고."
    "사실 나는 우리 마누라 덕에 보신을 따로 안 해도 될 정도로 건강해. 그러니 그저 된장찌개집으로 가."
    "내 생각하고는 다른데..."
    "물론 다르겠지. 그런데, 그 빌미는 내가 만들었잖아. 동료를 다섯이나 동행하겠다고 말이야. 사실 오늘 그 동료들하고 미리 점심 약속이 되어 있었어. 그런데, 자네가 온 거야. 그렇다고 동료들하고의 약속을 깨기도 어려워. 그래서 우리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거야. 당연히 밥값도 아껴야 하고 말이야."
    "그래, 알았다. 네 생각이 맞다."
    그렇게 우리 둘 생각맞추기를 끝내고, 우린 2,000원짜리 된장찌개 집을 찾아갔어요.
    그 이후로 지금껏 세월, 늘 함께 하는 밥자리고 술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요.
    이번 토요일인 12월 14일에 독서클럽 'Book Tour' 306회 발표회가 있어요.
    매주 수요일 아침에만 하던 모임을, 몇몇 회원들이 요청에 의해서 매월 두 번째 토요일을 더 보탰어요.
    이번이 그 첫 번째 모임인데,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점심때까지 이어져요.
    바로 그 모임에 유인경 기자님을 초대하고 싶어요.
    달변의 말씀을 좀 듣고 싶어서요.
    참가 시간은 편하신대로 예요.
    제 의견입니다만,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의 점심자리를 함께 해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어떠실까요?

  7. 감추사 2013.12.15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다파워에 몇번 들랑날랑 기다리다 보면 이렇게 새 글이 올라와 있어요.이 기쁨 깨고 싶지 않은 나만의 행복입니다.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이글을 계속 읽고 싶어요. 유기자님도 저도 건강하자구요 62년생입니다.

  8. J2J 2013.12.16 0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늦은 밤 유기자님의 글 너무 좋은데요.
    연말 연시 세모의 계절에 건강하시길 바라며
    내일은 월요일 출근해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잠자리로 가겠습니다.

  9. 이수경 2013.12.16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 기자님 글 너무 웃겨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