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맘때면 여성지들이 부록으로 내놓은 토정비결을 열심히 읽는게 습관이다.
해마다 “동쪽에서 귀인이 나타난다” “문서를 얻을 운” 등의 말에 괜히 가슴이 뛰기도 하고, “득남할 수”란 말에 “아들을 얻을 나이는 지났으니 남자가 생긴다는 뜻인가”라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제대로 맞은 적이 없다.

토정비결만 보는게 아니다. 요즘은 자제하고 있지만 점도 자주 보러 다녔다. 그게 소문이 나서 “용한데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는 청탁(?)도 상당히 많이 받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정색을 하며 경멸의 표정을 보인다.

 “아니, 언론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점집을 다녀요?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거나, 아니면 종교에 귀의하면 모를까 그런 미신을 믿다니 참 실망스럽군요...”

뭐 그건 개인의 취향이고 생각이므로 굳이 반박하고 싶지 않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점을 보는 이유는 그  점괘를 확신해서가 아니다.

점괘를 들으면서 주제 파악을 해서다.
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절대 점쟁이나 역술가를 만나 상담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도움말을 듣는다고 내 운명이 바뀔 것 같지도 않고  그들의 결정에 따라 내 행동을 바꾸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점을 봐서 손해보다 득을 더 많이 얻었다.

첫번째는 ‘주제파악’이다.
전형적인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인 내 남편은 참으로 다양하게 내 속을 썩였다. 잘해주는 것도 없는데 무심하고, 게다가 게으른 삼박자를 다 갖춘 사람이다. 평소에 내게 아무 관심도 없고 당연히 반응도 없다.
내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젊은 여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피가 너무 성분이 나쁘고, 여기저기 문제가 많고...” 등등 설명을 하자 남편은 그 의사에게 “그럼 언제 죽나요?”라고 물어 그 의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혼을 안 하고 꾸준히 사는 이유는 점괘 덕분, 아니 점 때문이다.


다른 내용들은 다 해석이 분분한데 대부분의 점쟁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렇다.

“댁은 남자가 귀한 사주라 어떤 남자를 남편으로 만나도 그 사람에게 대접을 받지 못할 사주다. 아무리 말이 많고 로맨틱한 남자를 만나도 그 남자가 남편이 되면 입을 다물게 된다.”


그 남자 탓이 아니라 내 사준 덕분이라니 굳이 내 남편을 원망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내 남편이 점쟁이들에게 미리 로비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내 남편도 내가 아니라 상냥하고 애교만점인 마누라를 만났으면 말랑말랑 자상한 남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주제 파악을 한 후에는 남편에 대한 원망, 분노가 줄어들었다.

신년을 맞아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는 이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다음은 ‘긍정적 해석’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인생은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태도도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도 “그래도 건강과 가족은 안 잃었으니 다행” 등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극복이 된다.

언젠가 후배 때문에 너무너무 속을 썩인 일이 있다. 지금은 다른 회사로 옮긴 그 후배는 일도 잘 하고 기사도 잘 쓰고 성격도 좋았는데 무슨 일인지 2, 3일을 연락도 안하고 사라져 버렸다. 지면을 채워야 하는데 연락이 되지 않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고, 나를 무시하는건가 하는 생각에 화도 나고, 사고난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러다 우여히 점보러 가서 후배 때문에 속이 상한다는 푸념을 했더니 그 역술인이 그 후배에게 감사하라는 말을 했다.

“이달에 아랫도리 때문에  속썩을 운이에요.  아랫도리가 뭐죠? 자식이거나 몸의 아랫부분, 혹은 손아래 후배나 조카 등등이죠. 그런데 그 후배가 알아서(?) 속을 썩여주니 덕분에 자제분 때문에 고민하거나 다리 등 몸에 이상이 없이 무사한 거에요. 그러니 그 후배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해요...”

말도 안되는 난해한 해석이긴 하나 어찌됐건 나는 그 말에 후배에 대한 미움은 사라지고 갑자기 감사의 염이 솟구쳤다. 그리고 이틀 후에 그 후배는 마냥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는데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단다. 만약 내가 그 떄 그 후배에게 “넌 직장이 놀이터냐? 공과 사를 왜 구분 못하냐”고 나무랐으면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을텐데 난 마치 가출했다 돌아온 자식을 대하듯 “살아와서 너무 고맙다”고 했고 덕분에 잘 아직도 잘 지낸다.


다음은 ‘끝없는 희망’이다.

해마다 점을 보러 가면 단골 메뉴가 있다. 다음해부터, 혹은 음력 생일이 지나면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행운의 여신이 내게 손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 대책없는 희망 주문에 또 속아 넘어가서 어려운 일도 “뭐 다음에 좋은 운이 온다니까”라고 넘어 간다.


그리고 참으로 내게 고마운 것은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라도 지나고 가면 다 잊는다는 것이다. 새로 점집을 찾아가 사주를 들이대면 “몇년도에 굉장히 어려웠겠는데 어떠셨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맞아요! 그해에 정말...”이라는 말이 나오는게 아니라 “글쎄요.. 뭐 그럭저럭 살았던 것 같은데...”란 건망증 증세를 보인다.
매일 힘들다, 죽겠다, 못살겠다. 짜증난다, 내 팔자는 왜 이래, 재수없어 등등을 부르짖고 온갖 구설수에 다 시달랐는데도 정작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이런 건망증이 내겐 정말 축복이다.


게다가 이젠 초긍정적 방법도 고안했다. 토정비결책을 뒤지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온갖 좋은 내용이 가득한 것을 마치 나의 토정비결 운수인양 차용하는 것이다. 가짜 약을 먹고도 병이 낫는 플라시보 효과처럼 짝퉁 운세를 믿고 새해에도 또 희망을 가져보려 한다.


 “어쩜 좋아, 어쩜 좋아. 나 새해에 운수대통이란다. 가정은 화평하고 일은 대박나고 자녀덕분에 기분좋고 갈수록 좋아지는 대기만성형이라네... 뭐 운명이면 받아들여야지. 흐흐흐”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구기일이라고 할만큼 운이 중요하다는데 그 운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움직이고 굴러가는 것이란다.


난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다. 새해에 벌어질 근사한 일들에....
아, 그런데 이게 병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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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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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돌아이 2010.12.04 0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
    간 밤에 "업이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인데 그말의 진 뜻은 뭡니까?
    마침 점을 얘기하셔서 물어보는겁니다.

  2. 산사나이 2010.12.04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에서 점 보는거 가장 좋아하는 서열을 먹이면 우리 마누라님이 단연 1등 할 기라요.
    언니가 점방 2개를 하는데 수입이 쏠쏠하답니다.
    근데 잘 맞춘다카이 유기자님도 함 오이소.
    장위동 유성집뒤에 있는데...
    사근동은 한대병원 뒤에 잇는데 처형이 세줬다 캅니다.

  3. 고수부지 2010.12.10 1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팔자려니~하면서 합리화시키면서 편하게 사는데 점이 특효약입니다^^주제파악,긍정적해석,끝없는 희망에 밑줄쫘~악!입니다~

  4. 파랑새 2011.04.14 04: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 기자님 병입니다...서서히 중병으로 진전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상큼하게 부드럽게 귀엽게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바른 판단의 글이 좋았는데..
    웬 점?? 지적이고 현실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웬 점?
    하지 마세용..재미로 어쩌다 한번 보는 것도 아니고 원 세상에
    지금 마지막 말 처럼 병 되면 으근히 점 괘에 기대를 걸고 그 결과에 기대게 됩니다
    하루 하루가 우리의 삶인데 어찌 될 지 모르는데 ..그것이 사실인데 우쩨 지성인이 되어가지고
    냉철해야 할 기자님이 점 이야기 하고 그러나 ...

  5. 행복 2011.04.19 1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기가님은 나보다 어린데 내가 2011년에 터득한 일상을 거의 흡사하게 아네요.

    답답할때 정신과에 가서 털어놓는 기분으로 가본적이 있는데

    내 상황을 대신 서준거 같아 하하하 웃고 또 웃엇어요 스트레스 좀 덜고 있네요.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