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분만에 점심을 먹었다.

같은 부서의 후배들이 무능한 선배인 나와 달리 너무 바빠서 느긋하고 여유롭게 점심을 먹을 수 없다며 김밥이나 샌드위치로 대신하겠다는 것을 억지로 근처 식당에 끌고가서 후다닥 후루룩 먹었다.

후배들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고, 난 남은 시간을 활용해 이 짧은 다리로 걸어서 교보문고로 갔다.

모처럼 겨울 하늘이 너무 파래서 자꾸 하늘을 봤다. 덕분에 목운동을 한 것 같아 흐뭇해하면서..


책방에 들어서면 난 마치 뷔페 식당에 온듯 황홀함이 느껴진다.

진열된 책들이 모두 나를 위해 인사하는 것 같고, 다 읽고 싶어 만지작거린다. 왜 그렇게 훌륭한 작가가 많고, 왜 그리 표지가 멋진 책이 많은지 소장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오늘은 꾹꾹 구매욕을 누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4권 샀다.

말콤 글래드웰의 <다윗과 골리앗>, 세스 고딘의 <이카루스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 서영은의 신작<꽃들은 어디로 갔나>..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소설책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시민들 (경향DB)



티핑포인트, 블링크 등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의 현상을 사회학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말콤 그래드웰은 뉴요커 기자 출신이다. 이제는 피터 드러커를 잇는 경영사상가로 성장했다. 그는 세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니라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 발전한다며 기존의 방식을 깨뜨리고 승리한 약자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단다. 목차만 봐도 행복하다. <이카루스 이야기>는 <보랏빛 소가 온다>의 저지 세스 고딘의 신작이다. 깨닫고 치유하고 변화하고 도전하는 길을 이카루스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평범한 사람도 자기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만 하면 모두 아티스트라고 그는 주장한다. 아, 과연 나도 환갑 이후에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을까. 책에서 답을 찾아보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1994년에 쓴 책이다. 전에 읽었는데 책이 사라져서 다시 구입했다. 작가로서 전성시대에 일본이 아닌 미국, 그리스, 이탈리아 등을 떠돌며 살아온 그가 미국 프린스턴에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의 책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글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하루키의 책을 읽을 때는 내 마음이나 태도가 독특한 자세로 세팅이 된다. 주말에 브런치를 먹으며 펴볼 요량으로 샀다. 나도 언젠가 하루키처럼 떠도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여행, 1년은 아니라 몇개월이라도 외국의 낯선 곳에서 낯선 삶을 체험하고 싶다. 외국어를 잘해야겠지만, 뭐 묵언수행하는 셈치고 이국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다.


서영은 선생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남편 김동리 선생과의 결혼 생활을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그가 25세쯤 30세 연상인 김선생을 만나 20여년간 그림자 여인으로 살다가 김선생의 둘째 부인 손소희씨가 죽자 세번째 아내로 그 집에 들어가 산 날들의 기록이다. 그동안 문학계 스캔들로만 다뤄졌던 이야기를 본인의 글로(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확인한다니 기분이 묘했다. 자신을 얼마나 객관화, 타자화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몰랐던 시절, 거의 27,8년전쯤에 서영은 선생을 인터뷰하며 “왜 결혼을 안하세요? 독신주의신가요?”라고 아주 무식하고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더랬다. 너무 순박하고 해맑은 인상에 고향인 강원도의 억양이 담긴 말투로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있는데... 결혼할 상황은 아니고...” 그때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막연히 집안이 반대하거나, 조건이 나쁜 사람인가보다라고 생각하며 같이 한숨만 쉬었다. 정말 솔직한 답변이었는데, 난 비밀스럽게 해석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틀안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교보문고에 간 김에 습관적으로 노트와 펜을 사는 문구류 코너, 예쁜 카드를 파는 곳 등을 구경하며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책 외에 펜, 필통 등 몇개의 문구류를 사들고 너무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광장시장 (경향DB)



겨우 20~30분을 투자했고 몇만원을 썼는데 부자가 된 느낌이다.

다른 날도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으면 시장에 간다.

동대문의 광장시장이나 평화시장, 남대문의 도깨비상가로 불리는 수입상품점 등등...

독특한 스카프, 품질좋은 면티셔츠, 두툼한 녹두전 등 옷과 액세서리와 음식의 천국이 펼쳐진다.

물론 나는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를 살피는 현장취재라고 스스로 납득을 시킨다.

지난 여름에는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구입한 인견 소재의 원피스와 블라우스로 정말 그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까실까실하게 잘 보냈다.

인터뷰 약속이 다음날로 미뤄져 2, 3시간이 빈 날에는 북촌이나 서촌 골목구경을 가거나, 좀 더 멀리 바람을 쐬러 간다. 서울 광화문 근처의 복작거리고 공해가 심한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눈이 시원해지고 공기가 맑은 전원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마음 깊숙이에서 해방감이 느껴진다. 


조금만 생각의 틀을 바꾸면, 혹은 직접 몸을 움직이면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 같은 판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사무실의 책상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내 방 의자에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던 일이 한적한 동네 카페 의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지고 컴퓨터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 뜯어도 안떠오르던 아이디어가 시장 모퉁이에서 불쑥 내 머리를 치고  평소 도저히 용서 안되던 인간이 해저무는 풍경을 보면서는 이해가 된다. (물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면 불끈 분노가 치미는 경우도 있지만..)

자투리 헝겊들이 구멍한 옷을 멀쩡하게 메우거나 근사한 조각보를 만들듯 쓸모없이 굴러다니던 단추가 멋진 액세서리가 되듯 이런 자투리 시간들이 때로는 훌륭한 아이디어도 만들고 내 삶을 풍요롭게, 알록달록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오늘 새로 산 펜으로 일기를 써야지. 그리고 오늘 밤에 자기 전에 말콤 글래드웰의 책부터 읽어야지. 글래드웰씨, 기뻐해주세요!! 그가 주장한 것처럼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을 익혀 오만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다윗의 지혜를 하나라도 얻어야지...





이렇게 혼자 뿌듯해하는데 똑똑한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인경아, 요즘 네 얼굴이 너무 칙칙하고 피곤해보인다. 방송에서 보니 옷차림도 좀 그렇더라. 옷도 좀 차려입고, 피곤에 찌들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렴...“

아, 자투리 시간을 책방이나 시장이 아니라 피부과나 백화점에서 주름살과 기미 제거, 고급의상 구입으로 보내야하는걸까?

친구의 우정어린 조언에 감사하면서도 난 책을 펼친다.

얼굴은 다시 주름살이 생기고, 옷은 낡아도 머릿속에 들어온 책, 마음에 새겨진 글들은 영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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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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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미행 2014.02.12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님의 꾸미지 않은 솔직한 심정과 글을 사랑합니다.
    50대 여성으로서 지성인의 한 전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짜투리 시간을 멋지게 활용하시는 님께 공감하고 존경합니다.
    선택하신 책을 독서하시는 동안
    영혼이 확장되고 맑아져서
    생기와 활력을 찾으실겁니다.
    늘 반성적 사고를 하시는 당신은
    선비이십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노년의 모습도 지켜볼 수있기를
    기대하며 당신을 늘 응원합니다.

    • 제이 2014.03.29 2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너무 공감합니다. 유인경 기자님의 꾸밈 없는 솔직함에 늘 감동을 받고 마음이 따스해짐을 느낍니다. 유인경 기자님의 기사를 읽거나 티비쇼에서의 입담을 들으면 늘 유쾌해진네요.

  2. 홍지원 2014.02.13 15: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응원해요 글이 너무나 재밌고 마음이 행복해지네요 좋은책 따라 읽어볼랍니다^^

  3. 올리브 2014.02.13 1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주 옛날 결혼전에 통근버스에서 내려 집에 가는 길에 헌책방이 있었어요. 그곳에 가면 신간에서
    느낄수 없는 뭔가 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오래된 좋은 책을 찾았을 때 너무나도 행복했던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 발견한 책이 이미륵선생의 "압록강은 흐른다"였는데 그 이후로 신간으로
    많이 발간되더군요. 너무나 좋은 책인데 값도 싸고 욕심껏 사다놓으면 벽장속에 아주 맛있는 간식을
    숨겨놓은 것처럼 참 행복했었는데 요즘은 뭐가 그리 바쁜지 머리맡에 책도 없고 드라마만 챙겨 보고
    있네요. 기자님 글을 읽고나니 다시 책이 막 읽고 싶네요~

  4. 감추사 2014.02.15 05: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동안 딴짓,재봉틀 돌려 온갖것 만들기에 몰두했었는데 이제 추운 2월이 가면 슬슬 책좀 읽어야 겠어요.방송에서도 여전히 맹활약하시는데 역시 유인경 기자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독서의 힘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어요.

  5. 최여심 2014.03.28 15: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황금을에서 보고 너무 말을 잘하시고 똑똑하셔서 찾아봤는데 역시 독서를 즐기시네요 멋져요 진짜루 항상 지금같은모습만유지해주시길

  6. 이수진 2014.08.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화점이나 피부과가 아닌 서점에서 기뿜을 찾는 유인경님 을 존경합니다. 저도 님처럼 사고 하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