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화장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20대는 화장, 30대는 분장, 40대는 변장, 50대는 환장이라며 나이든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조차
비하하는 세상이지만 화장에 신경을 쓴다.

자꾸 늘어나는 주름살,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늘어지는 얼굴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거울의 정직이 불쾌하기도 하지만
화장하는 시간이 길어진 이유는 아침과 저녁, 내 얼굴을 제대로 보는 시간만이라도
내가 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다.

예전엔 스피드메이컵의 진수를 보여주며 2분만에 기초화장을 마치고, 택시를 타서 눈썹을 그리거나
마스카라를 발라 짝짝이 눈썹이 되기도 하고 신호등에 급정거할 때는 눈을 쑤신 적도 있었다.
당연히 엉망진창이 된 화장 덕분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했고 딸 아이는 “엄마는 화장이 아니라 얼굴에 낙서하는 것 같다”며 나의 무성의하고 무지한 화장법을 나무랐다.

이제는 매일 아침에 화장대에 앉아서 적어도 20분쯤은 시간을 보낸다.
피곤한 날에는 팬더 곰처럼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오기도 하고,
라면을 야식으로 먹고 잔 다음 날에는 라면국수처럼 팅팅 불어터지기도 하고
피부색은 갈수록 칙칙해져 절로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그래도 “아이구 미쳤지 미쳤어. 이렇게 부을 걸 알면서 라면은 왜 먹었을까”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가 있다고 늦게까지 원고를 써서 곰탱이를 만드냐” 등의 비난은 하지 않는다.

우선 거울을 보고 반갑게 나한테 “안녕? 또 하루가 시작되네”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스킨, 로션, 아이크림, 에센스, 영양크림 등을 순서에 따라(과연 이게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차근차근 발라주면서 얼굴의 각 부위에도 말을 건다.

아이크림을 바를 때는 “내가 자주 웃어서 주름이 지는구나. 그래도 울어서 눈밑이 늘어진 것 보다는 낫쟎아.”라고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하면서 정성껏 바른다.
오십이 넘어서 목에도 크림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주변에 얼굴은 화장이나 각종 시술로 팽팽한데 목주름이 자글자글해서 고민하는 여성들이 많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작가이자 영화 감독인 노라 애프런 “나이가 되니 젊을 때 뉴욕 맨하튼의 아파트를 사지 않은 것보다 목관리를 안한게 더 후회가 된다”라고 쓴 글을 읽고 목에도 남은 화장품을 발라준다.

저녁에 돌아와서도 비슷하다. 전엔 피곤한 날에는 대충 메이크업 리무버로 지우고 잠들기도 했지만 요즘은 세수도 꼼꼼하게 하고, 다시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다독여준다. 남들에게가 아니라 우선 내 자신에게 내가 안녕했는지를 물어보는 시간이 그 때다.

“참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보람도 크다. 수고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야. 야호!”
“억울해도 속상해도 할 수 없어. 지금은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길이 안보여도 자고 일어나서 내일이 되면 잘 풀릴거야. 스트레스 받아서 얼굴에 기미 끼게 만들지 말자”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

화장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주름살이 없어지거나 피부가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내 표정만은 점점 평화로와지는 것 같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얼굴, 젊어보이거나 섹시해지려는 욕망에서가 아니라
내 얼굴이 주인으로서 그 부분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몸과 마음으로 보여주고 싶어서다.

오십이 넘은 여자의 얼굴은 화장품이나 성형수술보다는 그 사람의 평소 마음, 생각, 표정이 만들어가는 것 같다.
연예인들이나 젊은 후배들과 미모를 견주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내 외모 콤플렉스로 자기비하를 하며 우울해할 이유도 없다.

눈꺼풀은 조금씩 쳐지지만, 내 눈은 정말 많은 것을 계속 볼 수 있고
턱선은 허물어지고 탄력은 잃어가지만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너무 자주 웃어 눈밑에도 주름이 많지만  자주 웃는 덕분에 내 입꼬리는 올라가 밝아보인다.


종류가 같은 화장품들을 담은 바구니


“인경아. 우리도 성형수술로 리모델링하자. 온동네 다 재개발한다는데 우리만 이렇게 방치해두면 어떻게 하니”
여고동창 희숙이는 이렇게 또 날 웃기지만, 뉴타운으로 거듭나는 것보다 올드타운의 가치를 보전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이젠 마음에도 화장을 해야지.
우울한 마음에도 붉은 볼연지를 발라 화사하게 해주고
자꾸 기어드는 무력감에는 마스카라를 발라 생생하게 올려주고
스멀스멀 누굴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면 분가루를 바르듯 덮어버려야지.


이렇게 하루에 10~20분만이라도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남 생각하지 않고
온전하게 내가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이 험란한 세상에, 총맞거나 지뢰를 밟지 않고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자신에게 감사하고
오늘 나와 만나 추억을 만들어준 이들에게도 감사하다.


유인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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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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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수경 2014.04.11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만이 꽂길이다....이 말이 생각나요. ^^

  2. 캔디맘 2014.04.11 2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벌이로 마음까지 찌든 저에게는 선배의 다독임같은 이야기네요. 저도 10년후면 기자님과 같은 나이대가 되는지라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야겠네요^^

  3. 가을이 2014.04.14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60이 넘어서야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는데..

    자주 보고 말걸어 주면 나에게 상주는 느낌이죠

    아주 정답고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내가 기억할 마지막 모습은 아름다운 미소짓는 나

  4. 제이 2014.04.15 0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로지 나에게만 집둥하는 시간... 꼭 필요한 듯 해요.

  5. 리나 2014.04.17 22: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이 글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저도 입꼬리 올리는 연습을 하고 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나이 먹으면서 제 얼굴에 감사하고, 책임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6. 감추사 2014.04.30 1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리모델링 안하신 얼굴 맞나요? TV에서 보면 너무 주름이 없어서 당연 뭔가의 조치를 하신거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시간만 투자해도 그렇게 퍂팽하게 ~ 아휴 부러워라.

  7. 박나율 2014.05.01 1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기사님 글읽을때마다 다시한번돌아보게되고 멈칫,마음이 편해지는것같아요 ㅎ ㅎ 좋아요~

  8. 김자영 2014.06.09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에서 생기가느껴지네요^^ 아이셋 키우며 아이라인한번 그려보기힘드네요 뚫은귀가 막혀지기전에 오늘 한번 예쁜 귀걸이를 걸어봐야겠네요

  9. 안주희 2014.11.10 0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 대 여성입니다~ 저도 이렇게 저를 아끼며 나이 먹어가고 싶네요~ 50 대여도 아름다우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