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마음을 쏙이지 말그래이!”

성철 큰스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라(不欺自心)’. 자신에게 엄하고 정직하며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키라는 가르침이다.


거짓말 심리학 분야의 최고봉인 로버트 펠드먼 박사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인간은 평균적으로 10분에 세 번 거짓말을 한단다. 그게 남을 기분좋게 해주는 선의의 거짓말이건, 자신의 잘못을 덮거나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말이건간에 우리는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한다.  또 남을 속이는 것만큼 자신을 속인다.

최근 장관 청문회에 나와 살지도 않은 아파트에 살았다고 말하는 등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던 정성근 후보(16일 사퇴하긴 했지만)를 비롯, 정치인들은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데 자신도 그게 거짓말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을 속이는 것이 꼭 나쁜 일을 감추려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수시로 자신을 속이고 기만한다.

때론 그게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평화를 찾는 수단이기도 하다.


몹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상황에서도, 

육체적 통증이 심한 경우에도

망신을 당해 얼굴에 화로를 얹은 것 같은데도

“난 괜찮아요. 걱정마세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인간관계도 좋아 호인이라는 평판을 받는 분이 있다.

후배의 무례함, 지인들의 야비함, 친구의 배신 등을 겪었는데 항상 표정이 밝고 평화롭다.

처음엔 그 분의 인내심과 내공에 존경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대체 왜 저렇게 참고만 살까, 의아했다.

그래서 어느날 이렇게 물었다.


“참는게 능사가 아니에요. 화가 나면 화를 낼 줄도 아셔야죠.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지도 않고, 표정의 변화가 없으세요? 혹시 어릴 때부터 너무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경향신문 포토뱅크 - 김상민 기자



순간, 그 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곤 이렇게 답했다.


“맞아요. 난 너무 가난하게, 어렵게 자랐어요. 7남매중 막내여서 형이나 누나에게 반항을 해보지도 못했죠. 그리고 내가 겸손하게 차분하게 굴어야 다들 인정했으니까요. 덕분에 어른스럽다, 진중하다는 칭찬을 듣긴 했지만 너무 빨리 어른이 되는 대신에 너무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고만 했어요. 그리고 이젠 진짜 내 감정이 뭔지도 모르겠어요.”


그 분과 달리 평소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는 별명이 ‘엑스레이 표정’이다

아주 싫은 사람이나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표정이 어색해진다. 그리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잘 울고 남 흉도 잘 보는 편인데도 정작 나 역시 힘든 일이 생기면 정면돌파를 하거나 내 감정에 충실하는 대신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 뭘”이라며 헝크러진 마음을 보자기처럼 꽁꽁 묶어놓기 바빴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수시로 배가 아프고 따끔거려 소화기 이상인 줄 알았더니 쓸개에 돌이 가득 차서 염증이 생긴 상태였다. 곧 쓸개 제거 수술을 했는데 당시에 병 문안을 온 한 선배가 “어이 유인경, 네가 아직 쓸개가 남아 있었니? 항상 히히덕 거리고 다녀서 쓸개없는 인간인 줄 알았지”라고 놀렸다. 내가 날 속인 결과같다.  


속상하거나 아플 때, 무안을 당했거나 당혹스런 순간만이 아니다.

수시로 자기 마음을 속이는 습관이 되면 아주 기쁘고 즐거운 감정마저도 무시하게 된다.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정말 축하받을 일이 있을 때나, 혹은 빈말이라도 칭찬과 찬사를 들을 때조차

마치 절대 기뻐할 일도 아니고,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 부정을 한다.


요즘 예뻐 보인다, 나이를 왜 안 먹냐는 영혼없는 덕담에도

“아유, 아녜요. 자세히 보면 자글자글 한걸요. 다 화장빨이에요.”라고 손사레를 치고


상을 받거나 승진을 해서 축하를 받아도

“남부끄러워 죽겠어요. 그저 어쩌다 저한테까지 돌아온 자리에요” “그 상은 초등학교 때 교내미술 대회 입선 수준이에요. 참가상같은거요” “어쩌다 운좋게 승진한 거에요. 나만 승진한 것도 아닌걸요. 아이구” 등등의 말로 화답한다.


물론 겸손과 겸양은 미덕이긴 하다. 

하지만 정말 기쁘고 즐겁고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걸 부정할 이유가 있을까.


성철 스님은 자신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정해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자신과의 약속을 꼭 지키라는 화두를 던지셨지만, 매사를 나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는 나는 ‘속이지 말라’는 말씀도 달리 받아들인다.  

나는 나의 잘못과 실수를 덮기 위한 거짓말도 안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기쁨을 속이는 거짓말도 이젠 작별하고 싶다.


내가 남을 짓밟거나 사기를 쳐서 얻은 악행의 산물이나 불노소득이 아니라

노력하고 애써서 이룬 결과라면 더욱 그렇다.


내 또래에 비해 주름도 없고 젊어 보인다는 칭찬에도

“그러게요. 젊을 때 칙칙하고 두꺼워 속상하던 피부가 나이드니 주름이 잘 안생겨 효자 역할을 하네요. 내 튼튼한 피부에게 잘 해줘야지”라고 키드득거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고맙다. 네가 내 입에 들어와줘서”라며 기뻐한다.

내 책이 잘 팔려서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면 예전엔 “이런 형편없는 책이 잘 팔리다니 남들이 비웃는 건 아닐까, 십여년간 노작 끝에 발간한 책도 잘 안팔린다는데...”라고 부끄러워했지만 이젠 “오옷, 드디어 나의 전성기가 오는 거야. 독자들이 이제 나와 소통하는 거야. 인세를 받아 남은 융자금을 빨리 갚아야지”라고 뿌듯해한다.

내 딸이 착하고 예쁘다고 칭찬을 하면 예전엔 “아직은 착한데 뭐 모르지, 더 나이들어 어떻게 변할지”라고 말했지만 

이젠 “정말 내가 복이 많다. 그런 애가 내 딸이라니... 내 사주에 자식복이 많다니까 앞으로 더 잘하겠지 뭐”라고 생각한다. 


불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박이문 선생은 평생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철학하고 탐구하고 사색했는데

80대 중반에 초기 치매가 온 상태에서 이런 결론을 얻었단다.

“인생엔 정답이 없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어떤 의미를 찾거나 만들려고 애쓰는 것보다 

당장 내 앞의 일에 충실하고, 기쁨이건 고통이건 진솔하게 다 받아들이라는 것....이라고 난 해석한다.

거창한 명제, 대의명분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하고, 결국 정직이 가장 경제적이란 것도 이해한 후에

한여름의 팥빙수나 친구의 안부전화, 마음에 드는 립스틱 색깔에도 충분히, 흠뻑, 흐드러지게 기뻐하는 것.

그것이 생의 의미이자 조물주가 우리에게 매일 주는 숙제가 아닐까.


나의 기쁨에 솔직해지는 것이 어쩌면 남의 아픔에도 깊게 공감하는 길인 것 같다...고 난 생각한다.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는 이런 확신과 뻔뻔함이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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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수부지 2014.07.17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소~ 옳소!

    내 마음을 속이지말자~

    그래야 명대로 잘살거라고 확신합니다^^

  2. 소영선 2014.07.17 23: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와 성이같은(ㅋㅋㅋ) 소크라테스가 옛날에 말했었잖아요.~~
    여름날밤 수첩 잘보시는 각하처럼 농담 한마디 해봤구요.
    유기자님의 글에 찬사를 보냅니다,^^

    • 유인경 2014.07.1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크라테스와 종씨시군요. ㅎㅎ 조영남씨도 항상 조물주가 자기 종씨라면서 '우리 종씨가 말하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저도 처녀시절엔 미스유여서 다들 저를 그리워한다고 착각하며 살았죠. 이 무더위에 갑갑한 상황엔 그저 농담이 하고 싶어지네요. ㅎㅎ

    • 유인경 2014.07.1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크라테스와 종씨시군요. ㅎㅎ 조영남씨도 항상 조물주가 자기 종씨라면서 '우리 종씨가 말하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저도 처녀시절엔 미스유여서 다들 저를 그리워한다고 착각하며 살았죠. 이 무더위에 갑갑한 상황엔 그저 농담이 하고 싶어지네요. ㅎㅎ

  3. 서산 2014.07.20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생각이라고 봐요♥♥

  4. 백수오 먹는여자 2014.07.26 2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기자님의 이글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걸 느끼는 고물 아줌마랍니다.
    항상 가까이서 곁에 있는 친한 친구처럼 느껴진답니다.
    좋은글 계속해서 써주시길....

  5. 샛별 2014.08.26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어요^^.

    "인생의 무의미가 의미" 맞는 말인것 같아요.

    늘 살면서 정답이 뭘까 고민한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말이죠.

  6. 기원섭 2014.10.25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유기자님처럼 글을 많이 씁니다.
    글을 쓰다가 느낀 것이 자신의 삶의 모습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까발릴 수밖에 없더라는 겁니다.
    도저히 거짓을 쓸 수없는 것이 글의 속성인가 봅니다.
    그러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았느냐 물으면, 답은 '아닙니다.'입니다.
    제가 주위에 말하기를, 지난 세월에 쌓이 사연들 중에 95% 정도는 까발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피로 계산한 것일 뿐입니다.
    무게로 계산한다면, 겨우 5%만 까발렸을 뿐입니다.
    아직 까발리지 않은 것은, 한 건 한 건이, 제 명줄을 쥐고 있을 정도의 핵폭탄적 사연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제 마음을 속이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죽은 처제의 남편인 동서와 함께 청양산으로 단풍구경을 간 아내가 제게 이르기를 '오늘은 술 좀 마시지 마세요. 좀 쉬세요.'라고 했을 때, 제가 답을 하기를 '알았어.'라고 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 생각하기를, 오늘 저녁에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제 친구 성원이를 불러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작심을 굳히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