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배제로 더 주목받은 천정배 전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60)은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가장 개혁성향이 강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4선 의원으로 18대 국회 때는 두 차례나 의원직 사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 기간의 세비 1억2300여만원의 수령을 포기해 강직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야권의 중진이었던 그가 7·30 재·보궐선거 출마를 거부당했다. 천 전 장관은 광주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호형호제’했던 호남 출신 의원들이 자신의 광주 공천에 반대성명을 내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당 지도부는 공천 신청 후 면접까지 마친 그에게 전략공천을 이유로 끝까지 양보를 종용했다.

새정치연합은 왜 그를 거부했을까. 또 안산에서 4선을 했던 그는 왜 망신을 자초하며 광주를 고집했을까.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이상훈 선임기자



다른 지역에서 출마선언을 했다면 공천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왜 광주를 고집했나요.

“이번엔 진심으로, 간절히 광주에서 출마하고 싶었습니다. 4선 의원에 장관까지 지낸 제가 선수(選數)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최근 절실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호남 정치의 개혁과 복원 없이는 우리 당이 절대 수권정당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호남 정치의 개혁과 복원이 무기력한 우리 당과 정치를 일깨울 수 있다는 생각에 광주에서 그 불꽃을 피우려 한 것입니다.”

호남 정치의 의미는 뭔가요.


“쉽게 말해서 김대중 대통령의 DJ정신을 계승·복원하는 것입니다. 제가 5행시를 한 수 썼어요. 첫 글자를 따서 ‘디호강정정’이라고 하는데, 즉 ‘DJ정신 계승해서, 호남 정치 복원하고, 강한 야당 만들어서, 정권교체 이룩하고, 정의로운 통일복지국가 만들자!’입니다. 정권교체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DJ정신을 계승해서 호남 정치를 재건하는 데 있고, 그걸 실현하고자 광주 출마를 결심한 것입니다. 11년 전 DJ가 정치권에서 물러선 이래 호남 정치는 지금까지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낡은 기득권의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민주당 간판만 달면 아무나 당선된다는 안이함에 그저 공천권을 주는 지도부에 아부나 하고 정작 민심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했습니다. 무기력하고 낡은 호남 정치인들이 변화와 개혁의 모습을 먼저 보이면 다른 지역의 정치에서도 연쇄작용이 일어난다고 확신합니다. 현재 호남인들만이 아니라 야당 지지자들은 이래서는 정권을 교체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정의로운 통일복지국가를 만들기 이전에 호남의 개혁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제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광주에서 재·보궐선거가 치러져 공천을 신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내외에서 비판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내에서는 계파적, 낡은 정치의 시각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들이 저를 비토했다고 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선의로 비판한 분들도 있습니다. 왜 공천이 곧 당선인 광주에 출마해 쉬운 길을 가려 하느냐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뭐가 쉬운 길일까요. 제가 할 일, 가려는 길은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호남 출신의 중진 정치인은 비호남 지역에 나가 싸우고, 개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정권 탈환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 때문에 호남 정치가 황폐해졌습니다. 물론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부겸 전 의원의 경우 부산과 대구에서 출마해 떨어짐으로써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호남 정치는 다릅니다. 저도 지난 총선에서 정동영 전 장관과 더불어 강남·송파에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이미지나 스타일 위주의 정치는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더군요. 박근혜 공안정부를 견제하는 데 감히 저나 정 전 장관 같은 개혁정신이 투철한 정치인이 국회에서 힘을 발휘해야겠다는 진심을 당 지도부도, 후배들도 몰라주더군요.”

이왕 2년 쉬셨는데 2년만 더 기다리면 떳떳하게(?) 다음 총선에 출마할 수 있을 텐데요.

“지금 상황이 야당이나 전체 정치권에 너무 엄중한 시기여서 재·보선 출마를 결심한 겁니다. 지난 총선에 떨어지고 강제 안식년을 가지면서 여의도에 있을 때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대중들의 삶의 숨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고, 시각도 더 넓어졌는데 2년을 못 기다릴 이유도 없었죠.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음 총선에서 실패하면 대선에서 승리해도 식물정권이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승리를 위해, 다음 총선 승리를 위해서 지금부터 호남 정치를 개혁해야 합니다. 겨우 1년6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어요. 저도 책임이 있지만 야당이 너무 갈팡질팡하니 뭔가 제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당이 안철수 대표와의 연대로 우여곡절 끝에 새 당이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어떤 점이 가장 실망스러운지요.

“여전히 계파와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어 진정한 민주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민하게 국민의 욕구를 헤아리는 민심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까요.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음 정권교체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런 불행한 시나리오를 바꾸고 싶어 이번에 꼭 국회에 들어가고 싶었던 겁니다.”

이번 공천의 경우 지도부의 정략적 이해관계도 있겠지만 천 전 장관 공천을 반대하는 연판장을 돌리는 등 강경하게 나온 이른바 486세대 의원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요즘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누가 정치를 해야 하나, 누가 지도자가 돼야 하나, 누가 정치를 감당해야 하나….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과제가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엔 광복, 독재시대엔 민주화, 극단적 양극화 시대엔 양극화 해소 등등…. 그 시대적 과제에 목숨까지 걸면서 과제 실현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 정치를 해야 합니다. 486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고 기여한 것은 높이 평가합니다. 또 그들이 관료적 정치인, 즉 사시나 행시에 합격하고 꽃밭만 걸어온 듯 보이는 이들을 비판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저도 유신시대에 사법고시를 공부한 그 과에 속하죠. 하지만 그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정치인이 된 후에 보여준 행보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낼 수 없습니다. 속칭 ‘운동권정치’는 대의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또 다른 계파정치로 변질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개혁정치를 힘차게 밀고 나갔다면 한국 정치 상황이 이 지경까지는 안 되었을 겁니다. 그들 역시 편협하고 낡은 기득권 정치, 패거리 정치를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특히 의원들이 연판장을 돌린 것은 초유의 일인데, 정당한 공천절차까지 무시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정치인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정동영 전 장관과 더불어 천 전 장관을 올드보이라며 구세대 정치인은 물러나라고 주장합니다.

“저와 정 전 장관은 1996년에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486들은 아마 2000년에 대거 국회에 들어왔을 겁니다. 겨우 4년의 차이로 올드보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올드’냐 ‘뉴’냐는 나이나 국회의원 선수가 아니라 얼마나 개혁적인가, 얼마나 새로운 변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가로 평가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전 항상 쇄신과 개혁을 주장했고, 지난 총선에서도 당을 위해 기꺼이 낙선했는데 올드보이라니….”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 이상훈 선임기자


공천권을 가진 당 지도부와는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았나요.


“광주지역의 경우 당 대표나 사무총장 등 지도부가 경선이 원칙이라기에 저는 예비후보로 공천 신청을 하고, 이사도 하고, 사무실을 열고 혼자 선거운동을 했습니다. 제가 공천 대상에서조차 제외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저도 원외에 있어 스킨십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당 지도부에 무리하게 공천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지역에 조직도 없어서 쉬운 일이 아닌지라 당 지도부와 협의를 해서 공천 신청을 한 겁니다. 그 때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죠. 당 지도부에서 정말 당을 위해 필요했다면 제게 양해를 구하고 설득을 하고 명예로운 퇴로를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권은희 후보로 전략공천을 한 후에 문자로 위로 메시지를 보낸 게 전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정당의 공정한 공천 모습이 아닙니다.”

지도부는 항상 선당후사를 강조합니다.


“선당후사요? 전 항상 그래왔습니다. 그런데 진짜 선당후사가 뭔가요. 새정치연합에서 이 정부와 맞서 강한 주장을 하고 진정한 개혁을 하는 의원들을 원내에 끌어들이는 것이 선당이 아닌가요.”

이런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끼진 않습니까.

“더 어려운 상황도 당했는데요, 뭘…. 그래도 저도 인간인지라 감정적으로 상처도 받았죠. 그때마다 제가 누구보다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을 떠올립니다. 그분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습니다. 자신이 느낀 아픔보다는 냉정하게 그 상황에서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런 점을 저도 배우려 합니다.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한국 사회가 지난 100여년 동안 너무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습니다. 혹독한 식민지시대부터 냉전, 동족상잔의 전쟁, 군사독재, 고도성장 등등…. 그런 아픔을 체험하며 정치인들보다 오히려 국민들이 더 문제의식과 개혁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정치풍토에 환멸을 느끼기보다 그런 국민들의 열망을 대변할 새정치를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낍니다. 또 변호사로 활동하며 법조인으로 살기보다는 국민들과 더불어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치인이 된 것에 더 보람을 느낍니다.”

개혁의 아이콘인데요, 왜 항상 개혁을 주장합니까.

“개혁은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이뤄내니까요. 20년간 정치를 해보니까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10년간 정권 경험도 있습니다. 10년간 야당 경험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과 나라에 좋은 일인지를 이제야 알고 좋은 나라, 정의롭고 복지가 이뤄지는 국가를 만들 아이디어도 많습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정도전>에 이런 장면이 나오더군요.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네가 신하인 주제에 왜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냐’고 하니 정도전이 ‘이 나라에 왕은 군림하지만 정치는 나 같은 신하가 하는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저는 이방원의 뜻을 존중합니다. 왕권강화론이지요. 계몽군주가 들어서면 민본정치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권신들이 권력을 잡으면 필연적으로 권신들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계파정치가 되고 국민이 도탄에 빠집니다. 김대중 대통령 때가 계몽군주 시절이었고 그 후는 권신의 시대라고 봅니다. 현재 우리 당도 권신의 시대입니다. 계몽군주 시대로 돌아갈 능력도 안 보입니다. 풀뿌리 당원들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민주당으로 돌아가 그들이 훌륭한 계몽군주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한 정치평론가가 이번 공천을 계기로 차라리 천 전 장관, 정동영 전 장관,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이 힘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면 좋겠다는 말을 하더군요.

“사실 주변에서 무소속 출마를 권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우리 당이 그래도 새누리당보다는 개혁·쇄신이 가능한 당이라고 믿고 우리 당에 남아서 개혁의 불쏘시개가 될 겁니다. 저는 희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야당 텃밭인 광주로 내려가 호남 정치개혁에 힘을 보태고 낡은 구조 속에서도 국민과 당원들이 열망하는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 헌신할 겁니다. 정치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앞장서고, 자기 인생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국민이 편안하게,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사업자로 이익을 추구하는 홀몸이 아닙니다. 당원, 국민과 더불어 살아갈 정치인이고, 그 소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천 전 장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배낭을 메고 광주로 떠났다. ‘호남의 천재’, ‘개혁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던 20년차 정치인인 천 전 장관도 소설가의 상상력(김한길)과 사업가의 계산법(안철수), 그리고 투사들의 연판장(486)은 당해내지 못했다. 배낭을 메고 떠난 천 전 장관이 배낭 속에 무엇을 담아 돌아올지 궁금해졌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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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원섭 2014.10.25 1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고향은 경북 문경인데요..
    언젠가 택시를 탔더니, 그 택시 운전사가 이래더라고요.
    '고향이 문경이라고요? 아하~영남의 호남이군요.'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영남지역을 싹쓱이 할 때였던가 본데, 여당을 제치고 무소속이 당선된 곳이 바로 제 고향 문경이었지요.
    그 운전사는 그걸 비꼰겁니다.
    그때만 해도 제 성정이 좀 덜 성숙됐던 때라,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성씨인 '기'는 위로 거슬러 올리 고봉 기대승을 어른으로 모시고 있고, 지금도 호남땅에 혈족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도 원래는 호남 화순 쪽에 살다가 일제 초기에 경북 상주로 이주했다가 예천에서 6.25전쟁을 맞아 대구로 피난갔다가,먹고 살기 힘들어 다시 울 엄마 고향인 문경으로 온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게 고향을 물으면 화순이고, 상주고, 예천이고, 대구고, 문경이라고 말하는데 하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고향이 어디냐고 따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발 제발 고향이 어디냐고 묻기는 하되, 그것으로 사람차별 하지 않았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