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한 모임에서의 주제는 ‘선물’이었다.

송년 모임이라 자신의 일과 관련된 선물을 준비해온 분들이 많았다.
내의회사를 운영하는 분은 내복, 제약회사 간부는 영양제, 화장품 회사 관계자는 기초화장품 세트 등등이었다. 

그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상조회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음, 저는 오늘은 그냥 왔지만 다음에는 우선 오동나무 관 2구, 그리고 최고급 안동포 수의를 내놓겠습니다. 협력업체와 조율해서 화장터 자유이용권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한 회원이 끼어들었다.
“오늘은 안 나오셨는데 ㅇㅇ 판사님께는 뭘 부탁드릴까요?”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형량 감형권은 어떨까요. 물론 그 판사님이 재판을 담당할 경우이긴 하지만...”

그러자 ‘직업’에 따른 각종 선물 아이디어가 나왔다.

국정원 직원은 매우 궁금한 주요인사 정보열람권, 성형외과 의사는 무료시술권(결과는 책임 못진다고 함), 교수도 무료 강의권(별로 호응이 없었다), 음식점 주인은 무료 시식권, 가수는 부모 칠순잔치 때 무료 노래권, 피부관리실은 무료 경락마사지권 등등...

웃자고 한 이야기여서 다들 키들거렸다. 그러다 문득 신문기자인 나는 무슨 선물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한달치 신문을 모아 드리자니 그렇고, 인터뷰를 해주려 해도 이슈가 있어야 하고, 나쁜 기사를 빼주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고, 정계나 연예계 뒷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도 직업윤리에 어긋나고...

가장 좋은 선물은 독자들이 읽어서 알토란같은 정보를 얻어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한 줄의 글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기사일게다.
그런데 나는 연말이 아니라 평소에 과연 이런 선물을 드리나 생각해보니 절로 반성이 됐다.
이럴 땐 “난 기자 자격이 없어, 당장 그만 둬야지”란 자책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주장하고, 여성들이 활어회도 아닌데 (성형하지 않은) 자연산이 좋다고 주장하는 분도 여당 대표로 당당히 버티는걸 보며 위안(?)을 삼는다.

몇년전에 한 기업체에서 직원들에게 2000원씩을 나눠주고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어서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호빵과 우유를 선물했고, 어떤 이는 차비가 없어 쩔쩔 매는 할머니에게 버스비를 드렸고, 어떤 이는 엽서를 사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사연을 담아 보냈단다. 택시 기본료도 되지 않는 돈이지만, 다방의 커피 한잔이나 자장면 한그릇 값도 안되는 돈이지만 얼마든지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다.

선물이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필요하고 받아서 기쁜게 아닐까. 언젠가 청와대에서 소년소녀 가장에게도 민속주를 줘서 화제가 된 적도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풀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줘서 엉뚱한 물건과 명함까지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선물은 이처럼 그저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배려의 마음이 기본이다.

나는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선생에게 몇달에 한번 정도 책을 선물한다. 새로 산 것보다 내가 먼저 읽어서 그 분의 취향에 맞을 거라고 여겨지는 책을 드린다. 최고급 명품 선물도 받으시는 분인데 예의상일수도 있지만 그 분은 나의 책 선물을 너무 고마와하신다. 최근엔 99세의 일본 할머니가 쓴 시집 <약해지지마>를 드렸더니 주변 분들에게 20권쯤 사서 나눠 주셨단다.

“인경씨가 읽고 줄을 친 부분을 보는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 이 사람은 이런 문장에 감동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나와 일치하면 또 그게 재미있고... 이제 눈이 아파서 책을 자주 읽지는 못하지만 좋은 책을 읽을 때의 기쁨은 정말 표현할 수가 없지. ”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시간’을 선물했다.

1년동안 수고한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 혼자 가만히 평화롭게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정작 시간이 부족한게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허망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시간나면 인터넷을 뒤져 연예인들의 가십을 살피고, 기사에 올라온 심란한 댓글을 보며 흥분하고, 난해한 책을 읽어대고. 너무 지쳐 몸이 천근만근인데도 습관적으로 텔레비젼을 켜놓고 오락프로에 넋을 잃고... 대부분 나의 감성과 상상력을 죽이는 일을 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고 크리스마스엔 온전하게 집에서 평화롭게 보낼 생각이다.  텔레비젼은 물론 책도 안 볼거다.
빈둥거리고, 뒤척이고 마냥 심심해하는 것.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생각 저생각을 하고 가슴속에 잠겨 있던 추억의 자물쇠도 열어 보고, 얼굴에 팩을 하거나 반신욕을 하고 노래도 불러 보고...
분명히 남편과 딸 아이가 밥 챙겨달라 등등의 주문을 하겠지만 그것도 사절할 예정이다. 내 시간이니까.

그리고 그 시간만은 절대 나를 자책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을 거다. 각종 실수를 저지르고, 온갖 푼수를 떨고, 나이값을 못하며 살지만 그래도 나는 올한해 내 몸을 끌고 여기저기 다니고 궂은 일도 마다않았고 어찌됐건 살아 남았으니 대견하지 않은가.

또 내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비수를 꽂은 이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걸 통해 나를 단련시켰고 조금 더 포용력이 커지게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이다. 

가장 완벽한 ‘빈둥거리는 시간’을 선물하기 위해 수면 바지와 수면 양말을 준비했다. 폭신폭신한 바지와 양말을 신고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메리크리스마스 투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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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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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명동DJ 2010.12.23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기자님!
    올 한해 유기자님의 좋은 글들을 잘 보았던 경향의 독자입니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유기자님께서 늘 행복하시길 바라고
    또한, 매사가 습자지 물에 풀려 나가듯 술술 풀리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우리네 독자들이 재미있고 통쾌하고 좋아서 뒤집어 지는
    그런 칼럼들을 많이 많이 써주시길 고대한답니다.
    가장 중요한 게 빠졌네요.
    건강 잘 챙기셔서 우리 들이 방송에서도 매일같이 접했으면 합니다.
    제가 영어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Marry X-Mas & Happy New Year"

  2. 고수부지 2010.12.24 1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리스마스휴가에 무조건 아무것도 하지않고
    집에서 빈둥거리면서리 休~休~休 하세요~행복만땅!

    늘건강하시고 만사형통하세요^^

  3. 수선화 2010.12.25 2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유기자님 글 읽어보고 지금 완전 뒹굴고 있습니다.
    좋네요, 이러니깐...

  4. Tiffany 2010.12.26 0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기자님
    옛날부터좋아했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