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말에 부쩍 가정적이 됐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가끔은 외국에서 온 친지, 혹은 각종 문화공연 관람 등으로 저녁 늦게 집에 가는 경우가 있는데 최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9시 40분에는 귀가한다. 빨리 집에 들어가 편안하게 옷 갈아 입고 <시크릿 가든>을 보기 위해서다.
 



얼마전 일요일에도 한 어르신이 주최한 연말 모임이 있었다. 남자들은 술을 마시며 시국성토도 하고, 안상수 대표 흉도 보고, 이 엄동설한에 장외투쟁만 하는 민주당에 안타까움과 한숨도 보냈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자꾸 시계를 봤다. 그리고 지구평화에도  국가경쟁력에도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 영감님들을 적의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식사를 마치고 2차로 차를 마시자며 나왔는데 나는 마침 빈 택시를 발견하고 무조건 잡아탔다.

“집안이 엄격해서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거든요. 담에 봐요...”

잠시후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해서 전화를 걸어온 분께 이실직고를 했다. 시크릿 가든이란 드라마를 제 시간에 본방사수하기 위해 일찍 떠났다고... 그 분은 몹시 어이없어했다. 

아니 20대도 아니고, 반백년 넘게 산 아줌마가 무슨 로맨틱 드라마에 그리 심취하나요? 나이값을 하셔야죠. ”

로맨틱 드라마를 보는 것이 나이값을 못하는 거라면 뭐, 인정한다. 하지만 비난을 받더라도 <시크릿 가든>을 보는 즐거움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 로멘틱 멜러와 판타지까지 가미된, 현실성이 별로 없는 이 드라마에 중년의 아줌마가 매혹당하는 이유는 많다.
남녀 주인공이 너무 예뻐서이기도 하고, ‘마임 화장품’의 교육장 겸 부대시설인 이천의 비젼빌리지가 근사해서이기도 하고, 톡톡 튀는 대사들이 너무 재미있어서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도 하고 재벌의 이중성이 드러나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재벌들이 등장하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재벌들의 이면을 잘 그린 것 같다.
다른 드라마에서 재벌들은 그저 돈이 많을 뿐 별다른 철학도, 고민도 안 보여주고 더구나 치졸한 면은 잘 묘사하지 않는다. 가끔 처지가 너무 기우는 여성이 재벌 아들과 사랑에 빠지면 그 어머니나 아버지가 “이거면 되겠어?”라며 돈 봉투를 내미는 정도다. 그럴 경우 그 여성은 “전 그런 여자 아닙니다”라며 바르르 떨고 뛰쳐 나오는게 정석이었다.

속물인 난 그럴 때마다 대체 그 봉투에 든 돈이 정확히 어느 정도 액수인지, 실제 상황이라면 다른 여성들은 어떤 태도를 보일지가 항상 궁금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 길라임(하지원)은 비록 남자 주인공과 몸이 바뀐 상황이긴 했지만 그 돈을 당당히 받아 나와 하룻만에 집꾸미기에 써버렸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남자의 이모는 ‘걘 뭘해도 크게 될 애’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나이값’은 못하지만 확실히 나이를 실감한다. 왜나면 여주인공 길라임에게 빙의되어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길라임의 엄마 시점에서, 장모의 마음으로 그 드라마를 보게되는 거다. 만약 내 딸이 김주원(현빈 역)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 못말리겠지만 진짜 결혼한다면 기를 쓰고 말릴 것 같다. 재벌 가족들이 보여주는 ‘그들만의 리그’에 절대 참여하고 싶지 않아서다.



재벌 가문에 시집간 한 여성을 알고 있다. 예전엔 미스 코리아나 연예인들이 재벌2세와 결혼해 신데렐라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요즘은 가문끼리 M&A가 가능한 집안끼리만 결혼하는게 트렌드란다. 그런데 순정파 남편을 만나 평범한 집안의 딸이 그런 집에 시집을 갔다. 온갖 드라마틱한 과정을 다 겪은 후이긴 하다.

그 여자의 말에 따르면 시댁은 영국 왕실도 조선왕조의 후예도 아니고 그저 최근 반세기에 갑자기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것 뿐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왕족이라고 여기는 것 같더란다. 알고 보면 고려시대부터 정승이 몇 분이나 있는 뼈대있는 집안 자손인데도 평범한 회사원의 딸이란 이유로 그 여자를 마치 무수리 보듯 하더란다.
 
“가장 괴로운건 다른 집 며느리와 비교할 때였어요. 아무개집안은 며느리들 잘 들여서 사돈끼리 골프도 치고, 크루즈 여행도 하고 로타리 클럽에서 자주 만나는데 너네 집안은... 아무개집 며느리는 저번 추석에 친정에서 무슨 선물을 했는데 너네 친정은... 차라리 제가 살림을 못한다거나 요리솜씨가 없다고 야단치면 마음이 편할텐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친정 부모를 비아냥거리는게 제일 가슴 아프고 답답했죠.”

그 여성은 재벌가는 모든 것이 다 연극같다고 했다. 가족상을 당해도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게 아니라 “그때 내가 사준 아르마니 검정 수트를 입어라. 목걸이는 하지 말고 진주 귀걸이 정도만 해라” 등의 스타일링과 코디네이팅을 해준단다. 언제 사진을 찍힐지도 모르고 어떤 이들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항상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란다. 수시로 시누이에게 “영화만 3류가 있는게 아니라 인간도 3류가 있어” 등의 언어 모욕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단다. 남편은 사업에 너무 바빠 집에 와서도 별 대화가 없단다.

재벌가 며느리만이 아니라 딸들도 안쓰럽다. 이건희 회장의 딸들이나 신세계, 롯데가의 딸들이 이제 경영 일선에 나와 부사장, 전무 등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럭셔리한 여행을 즐길지는 모르지만 부모에게 인정받고 형제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지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일을 한다. 나 같으면 여유자적한 삶을 즐기련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모두 일중독이란 평가를 받는다.
특급호텔을 운영해도 매일 그 호텔 로얄스위트룸에 사는 것도 아니고, 놀이공원에서 매일 롤러코스터를 탈 수도 없고, 백화점의 주인이어도 하루종일 백화점 구경만 하는 것이 일상이 아니다. 학생들이 성적표를 받듯 그들도 그들의 경영실적을 평가받고 “오너 딸이라 시건방지다”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났으니 그렇지” 등의 뒷담화에도 시달린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0에서 시작해 90을 이뤘다면, 그들은 90에서 시작한 셈이지만 90에서 95를 이루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길라임이 내딸이라면 절대, 특히 그 드라마에 나오는 김주원과 어머니, 이모 등이 보여주는 천박한 신흥재벌 집안에 ‘무수리’ 취급을 받게 하지 않을 거다. 길라임은 현재 직업도 스턴트우먼이지만 과거 경력도 피씨방이나 식당에서 알바한 것 등이 대부분인데 그들과 어울려 무슨 대화가 통할까. 사람에게 가장 슬프고 아픈 건,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보다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게 아닐까. 불우이웃을 돕는 상류층의 헌신으로 주장하는 배려를 왜 감내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친정도 발복하여 친정부모는 물론 오빠나 남동생, 언니와 여동생이 대기업 간부 자리를 차지하거나 계열사 가장을 맡을 수있긴 하지만 그들도 ‘시혜 받았다’는 굴욕을 견뎌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능력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면, 배우자의 배경보다는 심성과 능력을 보는 게 낫다. 집안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게 돈많은 집이 나 고학력 학자집안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고 어려울 때 돕는 그런 집안 환경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사람, 알량한 학벌과 학식만 자랑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환멸을 느껴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건 절대 내가 걱정하거나 고민할 사항이 아니다. 그 어떤 재벌집에서도 절대 내 딸이나 우리 집안에 청혼할 생각이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뭐 천만분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해본 생각이다.

“이보게, 난 절대 자네 집안에 우리 딸 못보내겠네. 자네 아버지 회사 노사분규나 해결하고 오게. ”

아, 과연 이런 대사를 써 볼 기회가 있을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럼 구내 식당 경영권이라도 줄텐가?”란 비굴한 협상을 하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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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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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고은 2010.12.29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럼 구내 식당 경영권이라도 줄텐가?”ㅋㅋㅋ 선배 표정이 오버랩 되면서... 왜 일케 웃깁니까...

  2. 유인경 2010.12.29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딸 친구들이 '네 엄마 컬럼에 네 이야기 나왔다"고 알려줘 딸아이가 제 글을 가끔 읽어요.
    이번 글도 읽으면 엉뚱하게 자기를 끌어들였다면서 분명 인터넷 쇼핑몰에서 티셔츠라도 사달라고 요구할텐데... 쩝..

  3. 아리랑 2010.12.30 1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기몸살로 온 몸이 쪼개지는듯한 아픔이
    천정배의원의 "아프냐, 너도 사람이었구나"란 기사를 보는순간 몰핀을 한대 맞은것 같았고,
    유기자님의 새 글을 읽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 햇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고
    경향신문도 어려울 때 일수록 빛을 발 해주시는 길라잡이가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4. 고수부지 2010.12.31 0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이렇게 재미나게 써도되는겁니까?

    씨크릿가든만큼이나 글이 재미나서리 행복한 밤입니다^^

  5. 와우 2011.01.06 16: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있어요 ㅋㅋㅋ 경영권이라니 ㅋㅋ
    지금은 학생이지만 10년이나 20년이 지나서 결혼할때 절~대 재벌이랑은 안할 것같아요.
    드라마에서만 보여주는 모욕도 못참겠는걸요 !! 근데 경영권이라니 ㅋㅋㅋ 멋져욬ㅋ

  6. 삼삼 2011.01.18 0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만 퍼센트 공감 가는 글입니다.
    하지만 맨 끝에 구내 식당 경영권 이게 정말 압권입니다 ㅋㅋ
    기자님 좋은 글 감사해요!

  7. 돌쟁이맘 2011.01.18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 직장후배말이 생각나네요. 준 졸부 쯤 되는 집 아들이랑 사귀고 그집에 겨울에 인사간적 있었는데 그집 어머니와 시누이왈 " 한겨울에 코트를 다 입고왔네. 모피같은거 없냐는." 뭐 나중엔 안좋게 헤어지긴 했다는데 그말이 참.....

  8. 이문숙 2011.01.18 18: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안 겪어보면 모를일이겠지요, 20년을 살아도 돈 좀있다고 아들 직업좋다고, 며느리구박하면서 결혼이 자기들의 선처에 의한 배려인것처럼 구는 우리시댁도 있구요. 제가 산다고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여자들속을 좀 아는데, 그들은 돈이 계급인 것을 너무 잘압니다. 평범하나 위대한 사람은 결코 물신에 찌들려 남과 비교하며 강한자앞에서 약한 모습보이지않는 건전한 의식을 가진 보통의 우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요즘은 너무 대세인것 같아 씁쓸하네요

  9. ls 2011.01.19 0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요 맞아요 나도 내아들이 그런 집안과 결혼을 하겠노라 한다면 이리 말하고 말거 같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어디 떡잎이냐 그리고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뉘집 삽살이가 되려고 하냐. 그리고 아들. 쫌만 기둘려 엄마가 대박 한번 쳐 볼께 " ㄲㄲ. 아 인생한번 시크릿하네요

  10. 이지현 2011.01.24 1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같은생각이긴 한데요.. 절대로 딸을 말릴수 있을것 같진 않아요.
    원래 반대하는 결혼은 죽어도 해야 하는게 젊음이 아닐런지..ㅋㅋㅋ..
    그럼 전 이렇게 얘기 할 듯 해요.
    살아보고 힘들면 너무 힘들때까지 견디지 말고 위자료 적당히 받고 이혼해라.
    요즘 세상에 한번 이혼한게 무슨 흠이겠냐?
    그리고 애는 좀 살아보고 낳아라.. 남편이랑 이혼하는거는 뭐 그럴수도 있는데..
    애 떼어놓는건 참 못할거 같다.

  11. sleeper sofa mattress 2011.12.26 1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스틸이 아 어떻게 ~ ~ ~ ~ 그들은 비행에 천사처럼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