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항공’이란 애칭(?)을 대한항공에 선사한 조현아 전 부사장, 주차장 아르바이트 학생을 무릎 꿇린 백화점 갑질 모녀, 애인에게 결별을 통보받고 광화문대로를 역주행한 여성, 터널에서 길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차량의 유리창을 삼단봉으로 내리친 운전자.

최근 이처럼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해 폭력적 언행을 하는 사람, 의학 용어로 분노조절장애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평소 사회나 주변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참고 참다 폭발한 이들이 아닙니다. 재벌 3세, 중소기업 사장, 교육자 등 경제적으로 안정된 이들이라 더욱 문제가 심각합니다.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은 전두엽 등 뇌구조를 논하고 사회병리학자들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이나 양극화, 구조적 모순 등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분노조절장애인 급증의 주범은 “사람은 누구나 화가 나면 그럴 수 있다”고 대중들에게 왜곡된 인식을 시켜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닐까요. 출생의 비밀, 패륜 등 막장드라마라는 비난을 받는 줄거리도 문제지만 우리 드라마에서는 배우자에게 멱살드잡이를 하거나 따귀를 때리고, 카페에서 이야기하다 화나면 상대의 얼굴에 물을 뿌리는 장면이 너무 자주 노출됩니다.

밥을 먹다가도 심기가 뒤틀리면 식탁을 뒤엎고 밖에서 화난 일 때문에 집에 돌아와 집기를 집어 던지고 책상의 모든 물건을 손으로 쓸어버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18일 새벽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서부지검에서 조사를 받은 뒤 검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_ 연합뉴스


드라마는 우리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드라마에서 정상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수시로 따귀를 때리고 집기를 던지고 부모에게 극악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되면 시청자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에 익숙해집니다. 작가들은 왜 화나는 일만 그리 자주 그리고, 분노의 표현을 그토록 폭력적으로만 묘사할까요. 자기가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는 이유로 자기 아들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물세례를 하거나 따귀를 때릴 권리가 있을까요.

드라마가 분노조절장애인을 양산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엉뚱한 곳에 분노를 표출하다 보니 정작 우리가 분노해야 할 불의나 부정, 구조적 모순에는 화를 낼 기력도 없어지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습니다. 물론 가끔은 드라마에 엑스트라라도 출연해 누군가를 실컷 때려주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만….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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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칠링 2015.01.31 14: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되네요. 방송의 영향력이 참 큰데 말이에요. 인간에게는 mirror neuron 이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뇌는 실제로 그 행동을 하는 것과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경험한다고 해요. 막장 드라마의 폭력적인 장면들이 나도 모르는 새 내 정신을 해롭게 하는 건 아닐지..

  2. 예인 2016.01.13 2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정 기자님 글 참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