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바보상자’로 부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멍때리고 보면 바보가 된다는 의미겠지요. 그보다 텔레비전에는 ‘바보’들이 참 자주 등장합니다. 코미디프로에서 바보 캐릭터를 선보였던 배삼룡·이주일·심형래 등은 모두 톱스타가 되었고 드라마에서도 보는 이들이 답답해서 가슴을 칠 만큼 지순하고 우직한 인내심을 보이는 이들이 사랑받습니다. 예능프로에서도 탁월한 순발력을 보이거나 운동 감각이 뛰어난 이들보다는 이광수나 김종민(사진) 등 쉬운 게임에서 지는 ‘어리바리’한 이들이 인기입니다.


최근에는 한국말이 서툰 외국 출신 연예인들인 헨리나 엠버 등이 <진짜 사나이>에서 서툰 한국말 실력 때문에 의사소통도 못하고 군대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겪는 에피소드로 각광을 받습니다. 11개국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비정상회담>에서도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해박함을 자랑하는 미국인 타일러보다는 한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인 장위안이 호감도가 높습니다. ‘그까짓’이란 단어를 몇십번 반복해도 ‘그깍지’ ‘그까직’ 등으로 엉뚱하게 발음하는 중국 아나운서 출신 장위안의 어눌함에 시청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웃습니다.

실상은 멀쩡한 이들을 바보로 만드는 가학적 방송에 우리는 왜 웃고 심지어 그들을 사랑할까요. 그런 바보보다는 내가 낫다는 착각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 너무 똑똑한 사람, 영악한 사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닐까요.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며 담뱃값을 올리고 유리처럼 투명한 지갑을 가진 이들에게 연말정산 폭탄을 던지는 정부, 서로 정의의 사자처럼 상대 당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다가 세비 인상 등 자기 이익에는 대동단결하는 국회의원, 필요 없는 과잉진료를 일삼는 대형병원의 의사들, 도처에서 갑질을 일삼는 이들에게 지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냉철한 조언보다 그저 바보 같은 웃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시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 혹은 상처를 살짝 덮는 밴드의 역할을 하는 ‘방송의 바보’보다 진짜 바보가 그립습니다.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질 것을 알면서도 경기에 참여하는 그런 참바보가 방송에서나 주변에서 보였으면 합니다. 방송에서 만든 바보가 아닌 참바보, 그런 바보들의 천진한 웃음이 그립습니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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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현정 2015.02.06 2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감합니다....바보처럼 보여도 순수한 마음을 이용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 기원섭 2015.02.13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유기자님 다우십니다.
    나도 솔직히 바보처럼 살고 싶습니다.
    근데, 잘 안 돼요.
    자꾸 나서고 싶어요.
    오늘 이 댓글 하나 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제대로 마음을 담아내야 하니까, 어쩔 수없이 요 생각 조 생각 재게 되고, 그러면 바보가 또 안 된단 말이지요.
    그러다보니 또 주위로부터 얻어터지게 되고...
    어쨌든,
    모처럼 시원한 글 한 편 가슴에 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