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이 지나니 곳곳에서 청구서가 날라든다.

가장 먼저, 자주 날아오는 것은 그동안 내 몸을 함부로 굴리고 문제가 있다고 수시로 신호를 보내고 무시한 것에 대한 청구서다.


4년전인가, 5년전 쓸개를 제거한 것을 비롯, 내 몸의 여러 부분이 사라지고(?) 있다.

사흘전에는 무심코 껌을 씹는데 어금니가  뚝 부러졌다.

그 어금니는... 고등학교 때부터 충치 때문에 수시로 잇몸이 부었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다가 금으로 떼우고 다시 치아와 같은 빛깔의 뭔 소재로 덮은 이빨이다. 수십년을 누더기처럼 버티다가 껌 하나에 날아갔다. 치과에 가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치아라며 임플란트를 해야한단다. 치과 치료비 등 돈도 돈이지만 이제 이빨이 하나씩 빠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못해 무섭다.


전에는 피로하거나 아파도 그냥 한 숨 푹 자고나면 잊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전에는 식생활비에 가장 많은 돈을 쓰던 내가 요즘은 약값이나 건강보조제품을 구입하는데 지출히고 있다.

면역이 가장 중요하다기에 면역에 좋다는 웰문도 먹고, 홍삼추출액도 먹고, 유산균도 먹고 비타민도 먹는다. 친한 한의사가 싸게 준다기에 공진단도 구해 먹는 중이다. 방송 화면에  얼굴이 너무 칙칙하다기에 피부과에 가끔 가서 레이저토닝(정확한 이름도 모르겠다)도 해보고

홈쇼핑에서 각종 건강기구를 사들이고 있다.






어릴 땐 숱이 너무 많아서 감을 때도, 묶을 때도, 퍼머할 때도 짜증스러웠던 내 머리카락도 슬슬 내 곁을 떠나려 한다. 그 풍성한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중심으로 뿌리채 떠난다. 아직은 내 또래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럭저럭 숱이 있는 편이라 퍼머도 안하지만 샴푸 한 다음 욕조 바닥에서 확인하는 머리카락은 왜 또 그리 불쌍한지. 그래서 샴푸도 탈모방지용 비싼 걸로 산다.


아, 젊을 때부터 내 몸을 아끼고 잘 보살필 것을... 그리고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을 때 호들갑스럽게라도 병원을 찾아가 진단도 받고 치료도 받을 것을...

 

물론 암에 걸리거나 더 큰 병으로 고생을 하는 친구들에 비해서는 난 꾀병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왜 건강은 내가 지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런데 청구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자식들의 청구서’가 속속 날아온다고 한다.


한 친구는 아들 때문에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단다. 외동아들이라 고생도 안시키고 해달라는 것 다 해줬는데 서른이 넘도록 밥벌이도 못하고 이혼까지 했단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 직장을 구해주면 몇달 다니다 말고, 또 다른 직장에 가서도 적응을 못했다. 친구와 사업을 한다기에 자금을 대주고 결혼도 시켰다. 그런데 사업은 폭삭 망하고 며느리는 무능한 아들과 못살겠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전세값을 위자료로 주고 아들은 그집에 들어와 산다.


“내가 왜 그 아이에게 보다 엄격하게 교육을 못시켰을까 후회된다니까. 뭐 사달라고 할 때도 그게 왜 필요하냐, 그걸 가지려면 이런저런 일을 해라 등등 절제력도 키웠어야 했는데... 서른넘은 아들, 그것도 돌아온 싱글이 츄리닝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는걸 보면 잠도 안오고, 가슴만 답답해....”


또다른 지인은 딸로부터 청구서를 받았다.

모범생에 책임감도 뛰어나고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온집안의 자랑거리였던 딸은 최근 멀쩡한 직장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선언했단다.


“그동안 자기는 부모가 시키는대로, 부모 스케줄표 대로 살아왔다고 펑펑 울더라. 자기가 원하는 삶, 자기의 꿈은 생각도 못하고 살았단다. 이제라도 부모의 기대, 부모의 압력에서 벗어나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네.  그러면서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떠난대. 적어도 1년은 자기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싶으니 연락도 하지 말래. 난 우리 욕심이 아니라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더 나은 길을 알려주고, 더 성장하라고 했을 뿐인데 딸의 말을 들으면 완전히 욕심만 채우는 엄마더구나. ”


50대가 넘으면 자식 뒷바라지로부터 자유로와질 거라는 것도 착각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키워도, 엄격하게 다스려도 자식문제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떤 고스 그 누구보다 자식에게 날아오는 청구서는 더 대가가 크고 더 상처가 깊다. 자식과 부모의 계산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대책없이 낙천주의자인 나는 이 정도의 청구서를 받는 것, 또 그 청구서를 아직은 기꺼이 받아 처리할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어금니가 사라져도 임플란트를 할 수 있는 잇몸과 경제력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부지런히 각종 건강보조제를 사서 먹을 수 있고 그게 소화가 된다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크게 돌아올 청구서, 혹은 실패는 ‘후회’가 아닐까.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최근 펴낸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에서 “이혼, 실직, 경제적 고통? 가장 큰 실패를 후회를 남기는 거야”라고 했다.


대체 몇살까지 살지 모르지만 20년, 30년 후에 난 어떤 청구서에 가장 당혹하고 상처를 받을까. 내가 저지른 숱한 실패나 실수보다는 어쩌면 내가 용기가 없어, 혹은 게을러서 흘려버린 시간들, 시도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가장 가슴 아프지 않을까.


그때 왜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그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왜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아꼈을까. 왜 자주 여행을 가지 않고 왜 더 도전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청구서를 받지 않기 위해 난 순간순간을 의미있고 재미있게 살아야겠다. 


더 많이 웃고 더 자주 지인들과 연락하고 더 자주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씹을 치아와 소화력이 있을 때 맛있는 것 많이 먹고 가끔은 운동도 할 것.(아,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네...)



모처럼 블러그에 글을 남깁니다. 모든 분들이 양의 해에 평화롭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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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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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다 2015.02.2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탈모엔 두부가 좋대요.

  2. 칠링 2015.02.23 1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회가 덜하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치열하게 살아야겠어요

  3. 호산나 2015.02.23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그래도 여전히 미인이세요~^^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요~^^

  4. 기원섭 2015.02.27 1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놀랍습니다.
    이렇게 시원하게 털어놓는 용기가 그렇습니다.
    저.나는 10년 전에 틀니를 하고 있음을 인터넷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까발렸습니다.
    그때 제가.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유기자님과의 만남에서 그 열린 마음을 읽고 힘을 얻었던 결과였습니다.
    처음에는 좀 쪽이 팔리는 것 같았지만, 곧 시원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제 일상에서 '감춤'이라는 단어가 사라졌습니다.
    돌이켜 참 고맙습니다.
    오늘도 참 시원한 글 한 편 가슴에 담고 갑니다.

  5. 이지영 2015.03.02 0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유쾌하면서도 삶의 정곡을 꼭 찌르는 시원한 글들, 잘 읽고 있어요. 기자님 고맙습니다.
    오늘은 ...이 청구서란 비유...참 위트있게 그러면서도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가슴깊히 와닿네요.
    고맙습니다.

  6. 박유진 2015.03.04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재치있는 입담과 유머있는 글에 즐거워합니다. 사실 기자님 때문에 동치미를 재방송이라도 꼬박 꼬박 챙겨보는 일인입니다만 오늘글을 통해 기자님보다는 엄마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즘 일 때문에 떨어져 있는 엄마에게 전화 한 통 드려야 겠습니다. 저희 엄마도 기자님처럼 닳고 닳은 충치에 나이 들어감을 느끼며 혹여나 우울해 하시지 않을까해서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7. 살~바~녀!! 2015.03.25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동치미로팬이었는데 어느새 인경언니의 마력에 푸~욱!!! 빠져부~렀어요♥♥♥

  8. 이문도 2015.04.01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 너무 팬입니다. 이렇게 댓글입력만으로 만난것 처럼 기분이 좋아지네여^^: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9. 2015.04.02 2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0. 유지선 2015.04.09 1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4월8일 수요일에 경주에서 매력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한 강의 들었던 사람입니다.
    오른쪽 앞줄에 앉아서 더 가까이서 뵐수 있었습니다.
    강의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이렇게 인터넷으로 블로그를 찾아 인사드립니다.
    강의가 끝날무렵 찾아가서 감사 인사 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많은분들이 선생님 주위에 몰려서 포기했어요ㅠㅠ
    TV에서만 보다가 영광스럽게도 실제로 만나 뵙게 되고
    강의까지 들으니 너무 벅찼습니다.
    좋은 말씀들 너무 감사합니다!! 저에게 정말 필요한 조언만
    딱딱 잘해주셔서 정말 많이 도움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유머있으셔서 ㅋㅋㅋ
    진짜 재밌는거 아니면 입벌리고 잘 안웃는데..ㅋㅋㅋ
    그날 진짜 많이 웃었어요 ㅋㅋㅋ
    악어처럼 입 벌리고 ㅋㅋㅋ
    실제로 매력에 관해서 강의를 해주시지만,
    선생님 또한 너무 매력적인 분이신거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여자입니다 ㅋㅋㅋㅋㅋ
    기자라는, 표면적으로는 딱딱해 보이는 직업을 가진 분인데..
    어쩜 그렇게 유머있고 재치 있을 수 있을까요?
    한순간도 졸립지 않고, 지치지 않고, 시간이 어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2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어요.
    그것 또한 매력의 힘이겠죠??

    조언해주신 그대로
    따뜻한 감성을 지녔지만 극한의 고통도 받아 들일줄 아는,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 나겠습니다.
    또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뵙고 싶습니다!
    그때는 꼭 수많은 인파속을 헤쳐나가
    당당히 악수 한번 하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11. MM 2015.04.16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님의 글을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인데, 바쁘시겠지만 좀 더 자주 올려주세요!
    그리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