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절묘하고 오묘한 이름이다. 신구씨 말이다. 본명은 신순기로 신구는 예명이다. 새것(新)과 옛것(舊)이 공존하는 이름값을 하듯 그는 구세대와 신세대에게 동시에 사랑받고 있다.

그의 나이 80. 하지만 인생의 화양연화를 보내고 있다고 할 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를 보면 나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국립극단의 봄 레퍼토리 연극 <3월의 눈>에서 열연 중이고 3월 27일부터 tvN에서 방영되는 <꽃보다 할배>의 그리스 편에도 출연한다. 청소년들이 즐기는 게임 ‘서든어텍’의 캐릭터로도 만들어져 26일부터 상품이 출시되는 것을 보면 세대를 초월하는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국민할배’ ‘구아형’ ‘구요미’ 등 별칭도 많고, “니들이 게 맛을 알아?” “4주 후에 뵙겠습니다” 같은 유행어도 많다. 그를 만나러 국립극장을 찾은 날, 54년 경력의 노배우는 국립극장 대기실에 가장 먼저 나와 있었다.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겉이 닳아 테이프로 테두리를 감은 대본을 보면서.


한 조사 결과를 보니 연극계의 티켓 파워 1위를 차지했더군요. 신구란 배우가 출연하기 때문에 연극 티켓을 사는 관객들이 그만큼 많답니다.

 
 

“몰랐어요. 난 컴퓨터도 할 줄 모르고, 그저 무대에만 충실하려고 하니 잘 모르겠습니다. 왜 날 보러 오는지도 모르죠. 늙은이가 연극을 열심히 하니 안쓰러워 그런 건가, 허허허…. 지난해에는 방송 때문에 연극에 좀 소홀하기도 했는데 감사하군요.”

<3월의 눈>에서 함께 공연하는 손숙씨가 그러더군요. ‘50년 넘게 배우생활 하면서 신구씨처럼 사람 놀라게 하는 배우를 본 적이 없다’고. 첫 대본 리딩을 2월 6일에 하고 3일 뒤 첫 연습 때 대본을 통으로 다 외워왔다면서요.
“3일 만에 대사를 다 외워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15일부터 시작된 ‘꽃보다 할배’ 그리스 편 촬영 때문에 10일간 연습실을 떠나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한동안 연습에 동참할 수 없는지라 미안한 마음이고, 이를 보충하고자 대본이라도 먼저 외운 것입니다. 아무리 다 외워도 정작 무대에 서면 대사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고 특정 단어가 지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계속 읽고 외우고 할 뿐이죠.”

전 어제 읽은 책의 내용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암기를 잘하는 비법이 있습니까.
“연기자들마다 다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겁니다. 연극이나 드라마 대본은 맡은 역할의 상황이나 감정 등을 종합해서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면 외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체호프, 셰익스피어 등등 나라도 다르고 개성도 다른 작품을 연기하려면 그 나라에 대한 문화도 이해해야 할 텐데요.
“저는 한국 사람이라 그저 대본을 열심히 읽고 연출가와 끝없이 작품과 인물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같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연출자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무대도 달라지고 상대역도 달라지니까요. 또 같은 연출가의 작품도 매일매일 제 컨디션이나 관객 호응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져 작품마다 참 어렵고 어떤 때는 괴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피하면 어중간한 인물이 만들어지니 적당히 연기할 수는 없죠. 같은 한국의 아버지라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저 연구하고 노력해야죠.”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란 연극에서 병자 연기는 실감났다는 평이었습니다. 구부정한 어깨, 덜덜 떠는 손발, 힘없이 갈라진 목소리, 흐릿한 눈빛을 보며 몸져 누운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는지 막이 내린 후에도 우는 이들이 많았다면서요.
“전 솔직히 그전에는 간암 말기 환자를 직접 본 적도 없고 극중에서 제가 앓는 ‘간성혼수’가 무슨 병인지도 몰랐습니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바탕은 작가입니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써주셔서 그걸 바탕으로 했을 뿐이죠. 물론 나름대로 그 병 증세에 대한 조사를 했지만 작가에게 구체적으로 묻고 상상력도 보탰습니다. 그걸로 연기를 했을 뿐이에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떠나기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곧 모든 것을 놓아야 해요. 지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데, 죽는다는 것은 숨 들이쉬었다가 내뱉지 못하면 그게 죽는 거죠. 그런 차이가 얼마나 큽니까. 작품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반성하고 그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너무 남들에게 공을 돌리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아닙니까. 1962년 연극 <소>로 데뷔한 이후 1966년, 69년, 71년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고, 2010년에는 연극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제3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탔죠. 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데뷔하던 무렵은 영화건 연극이건 다 미남들의 전성시대였는데 어떻게 배우가 될 생각을 했습니까.
“운명인 것 같아요. 경기고등학교에서도 공부는 웬만큼 했는데 서울대 상대를 가려다 떨어졌거든. 그래서 당시에 후기 대학이었던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입학해서 그냥 적만 걸어두고 다음해에 또 서울 상대에 지원했는데 또 떨어졌어요. 할 수 없이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학원에 다녔습니다. 아나운서 학원. 내가 아나운서 되고 싶어했던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다 신문 귀퉁이에 난 작은 광고 하나가 인생을 바꿨습니다. 남산 드라마센터 배우 아카데미에서 1기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남이 써준 원고 읽는 것보다는 배우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물론 처음부터 할아버지로 시작했지만요.”

타고난 재능이 있거나 원래 꿈도 아니었던 연기자를 50여년 동안 하는 이유는 뭔지요.
“나를 미치게 하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난 천재가 아니라 노력형이에요. 제대로 연기를 하기 위해 열심히 대본을 읽고 역할을 분석하고 일상의 삶에서 모든 감정을 느끼려고 합니다. 요즘도 화장실에서 일 보고 물을 내리면서 ‘참 신세도 많이 지고 산다’고 중얼거려요. 내가 매일 무심코 하는 일의 배후에 너무나 많은 분들의 공이 들어 있다는 것에 감사하죠. 물도 하늘에서 내려 정수과정을 거쳐 우리 집 수도관을 타고 왔을 것이고, 변기를 만든 사람, 휴지를 제조한 곳, 심지어 그 원료인 나무를 심은 사람까지…. 난 무엇 하나 만들어서 남들에게 기쁨이나 이익을 준 적이 없거든요. 그저 연기를 했을 뿐인데 돈을 내고 연극을 보러 오는 분들도 너무 감사하지요. 연극은 특히 ‘미친 놈’들이 하는 짓이에요. 아직도 월급이 아니라 연봉 수백만원을 받고 연극 무대를 지키는 이들이 많아요. 나도 미쳤었고 지금도 미치도록 연기가 좋습니다. 아마 천부적 재능은 아니지만 내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광기가 지금까지 연극 무대에 오르는 힘인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미친 듯이 연기했던 작품을 꼽으신다면.
“출연한 작품들은 모두 애착이 갑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고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으니까요. 그래도 가장 기억나는 연극은 1969년에 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꼽고 싶군요. 유치진 선생이 저를 하와이대학의 이스트 웨스트 문화센터에서 1년간 공부하게 하셨는데, 귀국하고 나서 바로 했던 작품이죠. 남자 주인공 스탠리 역이었어요. 영화에서는 말론 브란도가 맡았죠. 상대역 블랑쉬는 최선자씨가 했어요. 또 1971년에 오태석이 연출했던 , 3년 전에 공연했던 체호프의 <벚꽃동산>도 잊히지 않아요.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연극은 물론 <햄릿>이죠. 그런데 이젠 틀린 것 같아. 너무 늙었거든. 햄릿의 아버지인 유령 역이라면 모를까.(웃음)”

그토록 사랑하는 연기와 연극이지만 혹시 외도의 유혹은 없었습니까. 경기고 동창 중에 고건 전 총리, 이종찬 전 국정원장 등 막강한 권력을 누린 분들이 꽤 있던데요. 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도 동기인데 그들이 부러운 적은 없었나요.
“공식적인지 비공식적인지는 모르지만 몇 번 정치 제안을 받기는 했어요. 1980년인가 81년인가, 민주정의당이 생길 때 고교 동창들이 많았거든. 하지만 싫었어요. 정치를 하려면 거짓말도 해야 하고. 포장도 잘해야 하는데 난 그런 재주가 없거든요. 말주변도 없고…. 적성에 맞지 않아 거절했는데 다 천직이 따로 있습니다. 80까지 이렇게 무대에 서는 내가 더 행복한 것 같아요. 돈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많아도 걱정이지.”

80이란 나이를 느낍니까.
“아뇨. 일흔이 넘고부터는 그 나이가 그 나이인 것 같아요. 물론 자꾸 피곤감이 쉬 느껴진다거나 서류에 나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쓸 때 나이가 의식되긴 하지만, 어떨 땐 내 나이에 내가 놀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일상생활이나 일하는 데 내 몸이나 나이가 방해되지는 않아요. 내가 철없이 까불고 사는지는 모르지만.(웃음)”

대중들은 연극 무대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로서도 좋아하지만 <꽃보다 할배>에서 보여지는 친근함. 배려심, 천진함 등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소년처럼 웃고 있고 뒤처지는 백일섭씨를 챙기고….
“그 프로는 대본도 없고 하루 24시간 내내 마이크를 달고 카메라가 쫓아다녀요. 카메라를 의식하거나 대본대로 연기하는 프로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저 나 편한 대로 내 성격대로 활동하는 모습이 보여진 겁니다. 나는 이 나이에 존경하는 이순재 형과 동료, 동생들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즐거웠어요. 누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그런 추억을 만들어준다는 데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어요. 처음 시작할 때도 ‘어쩜 이게 마지막 여행일지도 몰라’란 생각에 하나하나 잘 살펴봤는데 벌써 네 번째 여행이에요. 더구나 연극배우라면 다 가고 싶어 하는 그리스라서 더더욱 즐거웠지요. 순재형은 너무 직진하고, 일섭이는 너무 늦게 처지니 내가 따라가서 중재할 수밖에요. ‘니들이 게 맛을 알아’ ‘4주 후에 뵙겠습니다’ 같은 유행어도 일부러 만든 게 아닙니다. 아마 다른 이들과 다른 억양 등이 재미있어서 다들 따라해서 유행어가 된 것 같아요.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게 봐주니 너무 감사할 뿐이죠. 연극이건 여행이건 나 때문에 피해를 줄까봐 여행 가기 전에는 체력 단련을 합니다. 자전거도 타고 매일 빠른 속도로 걷고….”

그 프로에서 ‘신구 어록’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젊었을 때 할수록 좋을 것 같아. 경험하고 실수를 해봐야 고쳐지고 선택하고 그럴 수 있지’ ‘자기 생각대로 주장하고 살 필요가 있어’ 등 젊은이들에게 해주신 말씀들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닙니다.
“아, 그래요? 그저 내 생각을 이야기한 거예요. 우리 나이는 실수하는 것이 두렵지만 젊은이들은 여행이건 공부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개선이 되고 더 좋은 걸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자로서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어떤 일이건 적어도 10년을 투자할 각오를 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뭔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힘들어 하지 말았으면 해요. 꼭 연기뿐 아니라 다른 분야라 할지라도 적어도 10년 근처는 가야 자신의 일에 눈을 뜨고 추진력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일 부러운 것은 청춘이에요. 이렇게 아름답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래도 청춘들만큼 술을 많이 드신다고 소문이 났던데요.
“그래서 집사람한테 항상 욕을 먹어요. 밥 먹듯이 술 마셔서 운동한 거 다 망친다고. 하지만 난 술 마시려고 운동하는 거거든. 공연을 마치고 동료들과 마시는 술, 외국에 여행 가서 마시는 한 잔의 소주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죽음은 생각합니까.
“그럼요. 가장 최근에 읽은 책도 <죽음이란 무엇인가>예요. 두려움과 공포는 없어요. 그저 매일매일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죽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저 무대에만 서 있어도 존재감이 느껴지고 살짝 고개를 들어도 감정이 전달되는 관록의 대배우이지만 신구씨는 항상 연습실에 가장 먼저 와서 제일 오래 연습을 한다. 그런 성실함과 열정이 오늘의 대배우 신구씨를 있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늘 불평하고 구시렁거리는 이들에게 신구씨는 ‘니들이 인생을 알아?’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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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이올렛 2015.04.11 0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른이시네요 노인이 아니라^^
    40대 노인같은 저를 반성해봅니다~~
    유기자님, 행복한 봄날 되시길!요~♡♡♡

  2. 기원섭 2015.04.21 1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미소, 그 얼굴 풍경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연기도 좋고, 글도 좋고,
    그리고 사진도 좋고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