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임권택. 그의 평전을 쓴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임 감독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평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마주보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의해 짓밟히고 그 안에서 절망하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며 다시 일어선 사람의 내면의 기록이다.”

올해 80세. 그가 끈질기게 적어온 내면의 기록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임 감독은 김훈 원작의 <화장> 메가폰을 잡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자신의 102번째 영화다. ‘아내 간병에 지친 중년 남자가 젊은 여직원을 갈망한다’는 통속적인 소재를 삶과 죽음, 헌신과 갈망으로 고급스럽게 해석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일수록 감독의 감각과 역량이 중요하다. 이제 관객들의 채점만 남았다. 영화 연출을 시험으로 비유하면 임 감독은 시험을 잘 치른 듯하다.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말해준다.



<화장>은 섬세하고 세련된 연출이 돋보인다는 평입니다. 여든이란 연세가 자칫 무거워지거나 무뎌질 수 있지 않을까 우려를 했거든요.
“제가 워낙 세련된 사람인데 그동안 잘못 알려졌어요.(웃음) 우리 것을 찾는 영화를 주로 만들었지만 속으로는 그런 작업에서 벗어나야지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김훈 선생의 <화장>을 영화로 만들자는 명필름의 제안을 받고 기회다 싶었죠. 대부분 태흥영화사와만 작업을 했고 명필름과의 인연은 처음입니다. 이번 영화는 현대를 살면서 인간으로서 도리 없이 올라오는 감정, 그 감정이 여성을 향한 것이든 그 이외의 것을 향한 것이든 마음이 가는 결을 그대로 찍었어요. 이전에 했던 영화와는 면모나 형식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원작자인 소설가 김훈씨는 사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취재를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화장품회사가 홍보전략을 짜는 과정이나 뇌종양 환자까지 일일이 발품과 손품을 많이 팔았다고 합니다. 영화 역시 배경이나 심리 등이 매우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더군요. 아내의 장례식장에서도 광고 캠페인 시안을 결정하는 모습이라거나 회식 장면 등은 회사를 다녀본 이들이 실감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베니스, 베를린 등 전 세계 16개 영화제에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도 사실성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김훈 작가의 원작소설이 주는 문장의 힘이 너무 엄청나고 커서 그걸 영상으로 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50대에 찾아온 또 다른 사랑 이야기, 자칫 삼류 내지는 통속으로 치부될 이 이야기는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욕망의 한 유형이기도 합니다. 문학이 위대한 건 특유의 통찰력을 담아 그 삶을 진지하게 바라봤기 때문이죠. 상상과 허구의 영화라도 사실감을 살리지 않으면 영상의 감동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촬영 현장에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것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원작을 망친 감독이라는 비난을 받으면 제 자신의 열패감이 너무 클 것 같았거든요.”

인터뷰를 위해 다른 기사들을 검색해 보니 80~90%가 뇌종양을 앓다 죽는 아내 역할을 한 김호정씨의 전라 장면에 집중돼 있더군요. 임 감독이 가장 신경 쓴 장면이라고도 하고….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가 음모를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이긴 하지만 너무 가십성 기사가 많아서 당혹스러웠어요.
“감독으로서 좀 속상했고 김호정씨에게 미안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 연기를 위해 밥을 굶고 삭발도 하고 치부가 드러나는 촬영을 했습니다. 연기나 영화의 작품성보다 그런 부분만 강조되면 아무리 배우라고 해도 슬플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만 노출하고 관객이 그 상황을 알아서 유추하도록 찍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을 찍어도 사실감을 살리려면 그 부분이 핵심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지나온 곳, 앞으로 가야 할 곳이 다 살아나게끔 효과를 주기 위해 전라신을 찍기로 했습니다. 김호정씨에게 현장에서 반나로 찍은 부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어요. ‘치부가 노출됨으로써 치욕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다 드러내고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찍고 나면 이 세트는 철거해야 한다. 헐지 않고 며칠을 기다릴 테니 결정해 달라.’ 두세 시간 후에 김호정씨가 전라로 찍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를 이 영화로 처음 만난 사이인데 서로 신뢰감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베니스영화제에서도 그 장면에 박수와 환호가 가장 커서 호정씨에 대한 미안함이 좀 상쇄됐습니다.”

주인공 안성기씨도 이 영화에서는 기존 작품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문열 원작의 <안개마을>에서 마을 아낙네들의 성적 불만을 해소시켜 주는 깨철이란 거지 청년을 맡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거지 청년에서 회사 중역으로 신분은 상승했지만 원초적 욕망을 해결해주던 청년이 간병에 지쳐 사랑도 상상으로만 하는 중년이 된 것이 아이러니했습니다.
“오 상무란 역할은 안성기란 배우가 맡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저와 8편의 작품을 하며 배우나 인간으로서의 신뢰감도 컸지만 평소 그의 반듯하고 성실한 이미지, 오랜 경륜이 뒷받침되어 더 빛이 났다고 봅니다. 화장품회사 중역으로 헌신적인 남편이자 충실한 간병인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젊고 아름다운 부하 직원 추은주를 품고 있죠. 부인을 간병하는 병실 간이침대에서 자다가 젊은 여직원 추은주를 떠올리고 심지어 아내의 장례식장에서도 문상온 그의 검정 정장차림에 감춰진 젊고 싱싱한 몸을 곁눈질합니다. 아마도 안성기가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조금은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안성기라는 배우가 가진 인상과 사회적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안성기라면 오 상무를 조금은 관객들에게 납득시키고 관객들도 이해를 하고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평소 이미지가 나쁘거나 실생활에 문제가 있는 연기자가 맡았다면 자칫 파렴치해 보일 수 있는 역할인데 안성기씨는 잔인한 삶의 현실에서 들끓는 중년 남자의 서글픈 갈망을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유부남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보니 80%가 ‘아내를 사랑해도 다른 여자를 욕망할 수 있다’고 응답했더군요. 좀 더 솔직하게 응답했다면 90%는 될 것 같은데요. 임 감독님도 그 중의 한 분인지요.
“그럼요. 그러니 이 영화를 만들었죠.(웃음) 욕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죠. 행동으로 옮기느냐, 안 옮기느냐만 다를 뿐입니다. 김훈씨가 한 인터뷰에서 ‘소설에서 오 상무와 추은주의 로맨스가 전혀 진전이 안 되고 지지부진하게 끝나서 영화에서나마 그게 좀 이뤄지지 않을까, 내심 바랐는데 진전 없이 씁쓸하게 끝나서 아쉬운 생각은 든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꽤 들다보니까 100번 저지르고 싶은 일들을 차마 저지를 수가 없어요.(웃음) 영화하는 사람들과 늘 만나는데 부끄럽게 그런 내밀한 일까지 드러낼 게 무어가 있냐, 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되어 영화 모양새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변명 아닌 해명입니다.”

<화장>이란 제목 자체가 ‘몸을 태워버린다’와 ‘얼굴이나 몸을 꾸민다’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사랑도 그런 것 같습니다. 투병 중인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젊은 여직원의 싱싱한 몸을 떠올리는 가슴속 사랑도 있겠지요. 사랑도 이중적일까요.
“제가 이 영화에서 관객들이 봐주길 원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오 상무가 업무에 지친 몸으로도 아내의 대소변까지 씻겨주는 헌신을 하는데 잠시 마음에 여직원을 품었다고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헌신을 하려면 인간으로서의 이지적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욕정을 해소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성의 힘, 책임감이 있는 사랑임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나이 든 노인이니까 그렇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나이’를 말씀하셨는데 영화감독에게 나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영화란 결국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제 감성을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그 속에 제 삶이 그대로 담깁니다. 제가 살면서 본 것, 느낀 것 등등 삶의 체험이 녹아들게 되죠. 그래서 90세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잘 몰라 영화화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주인공은 50대이지만 결국 80세의 임권택이 바라본 세상을 찍은 겁니다. 그래서 20~30대의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보고 느낄지가 궁금합니다. 성에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세대에게 부인을 인내와 헌신으로 간호하는 오 상무의 노력, 그리고 그저 마음으로만 갈망할 뿐 손 한 번 못 잡는 절제심이 이해가 될지….”

그래도 89세 할머니와 98세 할아버지의 순애보를 담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젊은층에서도 엄청나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서편제> <취화선> 등 한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영화들도 임 감독이 60대 이후에 찍은 작품들 아닌가요. 한 인터뷰에서 ‘내가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는 너무 저질스럽고 엉터리라 버리고 싶다’는 고백도 했지요.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오래 살고 오래 영화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보다가 하도 한심하기에 ‘어떤 자식이 저런 영화를 찍었냐’고 화를 냈는데 자막에 제 이름이 나오더군요.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래도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으로 조금씩 발전하고 진화해 왔습니다. 이번에 해외영화제에서 공로상을 받으면서 수상소감으로 ‘초창기에 50여편을 닥치는 대로 찍고 너무 부끄러웠다. 세상사람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10여년을 나 자신에 대해 비판하고 반성했다. 40여년을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아직도 헤매고 살지만 그것에 대한 노력으로 상을 주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반성’ 이후에 한국적 소재로 방향을 돌린 이유는 뭔지요.
“초기에 미국 영화에 미치고 빠져 그 영화를 흉내내는 작품을 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 넘기는커녕 아류작밖에는 못 만들겠다는 자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지 못하는 영화를 찍자고 결심했습니다. 한국의 정서, 한국인의 삶이 갖는 리듬을 찾고 고민하다 <만다라> <족보> 같은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에서도 제일 호응이 크더군요.”

오랜 연륜, 그리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작품성으로 ‘거장’으로 불립니다.
“정말 거북살스러운 호칭입니다. 대체 거장의 기준이나 의미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거장으로 불리는 다른 감독들에게도 ‘스스로 거장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고도 싶어요.”

그럼 임 감독이 진정한 거장이라고 생각하는 감독은 누구입니까.
“누구 한 사람을 꼽기가 힘듭니다. 좋은 영화는 제게 최고의 교육이고 모든 감독들은 훌륭한 교사입니다. 초기에는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감독 등 미국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엔 다시 보게 되질 않더군요. 그런데 페델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은 두 번이나 봤습니다. 굉장히 마음을 울렸어요. <취화선>으로 상을 타고 유네스코 본부에서 공로메달을 주는데 페델리코 펠리니를 기념하는 메달이었습니다. 감회가 깊었고 영광스러웠죠.”

<축제> 등 임 감독의 작품에는 유난히 죽음이 많이 다뤄집니다. 특히 이 작품은 장례 장면으로 시작하고요. 원작자 김훈씨도 이 작품을 ‘죽음의 시선에서 바라본 삶’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인이나 수도자 등 많은 이들의 죽음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살아보니까 젊었을 때 생각한 죽음, 중년의 죽음, 80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죽음이 다 다릅니다. 중년까지만 해도 죽음을 스스로 치장하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이 나이가 오니까 치장할 것도 말 것도 없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젊을 때처럼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할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80이 되니 그저 담담하게 단순하게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김훈씨도 ‘생로병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순간에 뒤엉켜 있고, 그런 깨달음이 우리가 우리 삶을 더 경건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평생 갈채를 많이 받았고 102번째 작품인데도 여전히 관객 반응이나 흥행에 신경이 쓰입니까.
“그럼요. 관객이 사랑해주지 않는 영화는 의미도 없어요. 연기자, 제작진들이 정말 혼신을 다했고 돈도 많이 들여 찍은 작품인데 흥행도 잘되었으면 합니다. 저야 영화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미친 상태에서 영화를 찍지만 개봉이 된 후엔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되니까요.”

임권택 감독은 “영화를 왜 계속하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영화에 대한 절절한 애정, 아니 삶이 곧 영화이고, 영화가 곧 삶이 된 경지가 느껴졌다. 임 감독은 시종일관 영화에 대해 경건했고, 겸손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자신감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기원섭 2015.04.21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흔 나이를 바라보는 나도 영화 한 편 만들고 싶은 꿈이 있어요
    언젠가는 아주 짧은 단편이라도 만들 겁니다
    여든 나이에 그렇게 칼라 있는 영화를 만드신 임감독님 그 분이 한없이 부럽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