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팻감’이라는 바둑 용어가 화제가 됐다.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홍준표 경남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20여년 전에는 팻감으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팻감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글을 올린 것이다. 팻감은 바둑 용어로 패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다른 곳에 희생타로 던지는 수를 말한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바둑 용어는 ‘팻감’만이 아니다. 만화와 드라마로 화제가 된 미생을 비롯해 초강수, 자충수, 묘수, 독수, 무리수, 승부수. 꼼수, 호구, 꽃놀이패 등이 다 바둑에서 유래했다.

북송(北宋)대의 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인간사란 그저 한 판의 바둑(世事棋一局)일 뿐”이란 말을 남겼다. 무기라고는 검은 돌과 흰 돌뿐. 흑백의 돌과 나무판에 그려진 361로만으로 인생의 희로애락과 길을 알려주는 바둑.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뜨겁고 치열한 바둑의 세계가 문득 궁금해졌다. 정치권에서도,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쓰이는 바둑 용어의 참뜻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여류 국수 박지은 9단을 만나 바둑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여자 바둑기사로서는 최초로 500승을 이뤄낸 그는 소녀 같은 얼굴에 담담한 어조로 바둑의 매력과 한국 바둑의 현실을 말했다.



지난해 500승의 쾌거를 이뤄 화제가 됐습니다. 그럼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바둑 경기를 한 건가요.
“1997년에 입단해 정식 대국 외에도 수많은 바둑을 두어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긴 만큼 졌을 테니 1000번은 확실히 넘을 겁니다. 올 상반기에도 여자바둑 리그에 참가했고, 요즘은 인터넷 바둑도 인기여서 참 많은 경기에 참여한 것 같군요.”

바둑을 10살 때 시작했다는데 그때 ‘아, 이게 내 장래의 길이로구나’라는 판단이 들던가요.
“겨우 10살에 시작했지만 바둑기사로서는 매우 늦게 입문한 셈입니다. 대부분 6세 정도에 재능을 발견해 시작한 이들이 많아요. 아마 1급인 아버지가 바둑을 좋아하셔서 곁눈으로 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바둑교실에 다니면서 정식으로 배웠습니다. 그저 무척 재미있고 좋았어요.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바둑교실 원장님이 부모님께 ‘다른 동네에 가더라도 지은이는 꼭 바둑을 시키라’고 당부했답니다. 바둑은 변화의 재미가 있어서 푹 빠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피아노, 미술학원 등 다른 학원은 다 그만두고 바둑학원만 다녔습니다. 다른 일에는 비교적 산만한 성격인데 바둑을 둘 때는 굉장한 집중력이 생기는 것도 신기했고요.”

중학 1학년 때 바둑 때문에 자퇴를 했더군요. 바둑과 학업을 병행할 수는 없었나요. 너무 속물적인 말이지만 최종 학력이 ‘초졸’,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셈인데요.
“바둑을 배운 지 1년 만에 1급이 됐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한국기원 연구생이 됐습니다. 제 꿈을 프로 바둑기사로 작정했기에 바둑과 공부를 병행할 수가 없더군요. 휴학하려 했지만 1년 이상은 안 된다기에 학교를 중퇴하고 도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특기생으로 진학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 학교 다니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바둑을 배우기에도 시간이 빠듯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제 결정을 존중해주셨지만 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하고 무엇보다 여자인 제 장래를 무척 불안해 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왜 중퇴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편지를 써서 설득을 했습니다. 지금도 학업 중단을 후회하진 않아요. 제 인생에 평범한 ‘학창시절’이 없다는 건 좀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만 중·고등학교 동창은 없지만 인생의 친구들은 많아서 특별히 불편한 것도 없어요.”



바둑에는 전혀 문외한인지라 멍청한 질문만 하게 됩니다만, 운동선수도 연습을 해야 하듯 바둑도 공부나 준비가 필요할 텐데요. 평소 어떤 공부를 합니까.
“어릴 때는 무조건 바둑 실전을 많이 하거나 다른 바둑 대국을 살피면서 수들의 의미와 흐름을 공부합니다. 제가 처음 입문할 때는 일본이 바둑 대국이고 인터넷이 활발할 때가 아니어서 일본 기보 자료를 번역해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둑은 고도의 심리게임입니다. 상대의 심리를 읽는 것만큼 제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하죠.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심리적 동요가 일어나면 다 이긴 게임에서 역전패를 당하기도 하고, 상대의 허를 찔러 역전승을 거두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 불안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경기를 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가도 하고 명상도 하고 인문학 책, 심리학 책도 읽습니다. 체력도 매우 중요해요. 몇 시간, 혹은 하루 종일 앉아서 초집중해서 경기를 하는지라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거든요.”

바둑에서는 운도 중요하지 않은가요. 엄청난 고수들도 신인에게 허망하게 패하기도 하고, 새파란 신예가 돌풍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더군요.
“저는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노장이라도 때론 흔들리기도 하는데 그걸 정확히 간파해 제대로 된 수를 두는 것은 운보다 실력입니다. 또 체력이나 심리적 동요가 일어나는 것 역시 평소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각자의 돌을 쥐고 공평하게 수를 두는 바둑의 세계는 실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한때 ‘아마조네스의 여전사’ ‘여자 유창혁’이란 별명으로 불렸고 국내 최초의 여성 9단, 최초의 500승 등 승승장구만 했습니다. 예전에 ‘반상의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진 뒤 반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장면이 인상에 남아 있어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바둑은 경기의 과정만큼 복기가 중요합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두었어도 이 판에서 어떤 수를 잘못 두어 졌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물론 너무 어이없이 졌을 때는 바둑판도 보기 싫고 경기가 끝나고도 복기를 할 여유가 안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기를 하는 것은 굉장한 훈련이 되고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 다음에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또 상대방과 나의 판단의 차이를 알 수도 있고요. 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반상을 응시했던 것은 그런 공부의 한 면이었을 겁니다.”

소동파는 물론 많은 이들이 바둑판이 인간사라고 하고, 바둑에서 인생을 배운다고도 합니다. 박 9단은 어떤 것을 배웠습니까.
“바둑을 두면서 정말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생기고, 끊임없이 그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모든 감정이 바둑 한 판에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이길 때의 승리감, 제가 졌을 때의 낭패감,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상대 패가 엉뚱할 때의 당혹스러움 등등…. 결국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도 바둑을 두면서 배웠습니다. 우리 인생도 남들과 어울리고 대결하면서도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과정이니까요. 그리고 바둑은 결국 꼼수를 쓰는 이보다 정도를 따르는 이가 이깁니다. 갑과 을도 없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기입니다. ‘대마불사’란 바둑 둘 때 이어진 여러 개의 바둑점은 반드시 살 길이 생겨 죽지 않는다는 말인데, 마치 공룡같이 큰 기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잘못 쓰이고 있지요. 바둑의 핵심은 패인데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게임에도 바둑의 패만큼 절묘한 해결 방식은 존재치 않는 것 같습니다.”



한때 반상계의 여제로 불렸지만 요즘은 조금 주춤한데요.
“슬럼프가 온 것 같습니다. 제게는 여자 최초의 9단이나 500승 기록이 따라다니지만 그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매 경기나 대회마다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 꼭 승리하자는 생각으로 매 경기에 임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승부욕이나 열망만큼 스트레스도 커지더군요. 스무 살 때 어느 날 대국을 하다가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들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숨이 차오르는 현상이 반복돼 병원을 찾아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왔어요. 그 후에 같은 증상이 반복됐고, 의사로부터 그 병은 몸이 아파서 생긴 병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집착으로 얻어진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여전히 스트레스로 인한 각종 신경성 질환이 오기도 하고, 중요한 국제대회를 앞두고도 건강이 좋지 않아 국가대표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하고, 병원도 가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면서 체력을 다집니다. 한동안 대국이 없을 때는 잘 놉니다.”

바둑계는 남성천하이고 엄청난 정신력과 체력 싸움이기도 한데 여성기사여서 불리한 점은 없습니까.
“적어도 제게는 여자라는 것 때문에 불리한 점이나 불공평한 점은 없습니다. 여성기사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고, 남녀구별 없는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으니 기회가 더 많은 셈이죠. 체력 역시 몸으로만 하는 경기가 아닌지라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도 있고, 마인드컨트롤은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고요. 또 여성기사라는 이유로 매스컴의 주목도 더 자주 받는 편이라 오히려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두뇌와 실력으로 승부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박 9단 같은 스타 기사가 안 나올까요. 한국 여류바둑계의 앞날은 어떤가요.
“여류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바둑계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이창호, 이세돌과 같은 1인 독주시대가 끝나고 대혼란기에 빠진 것 같습니다. 과거 선배들은 바둑을 도나 선의 경지로 두셨다면 지금은 스포츠게임이 되었죠. 또 장고 끝에 두는 상황이 불가능합니다. 속기화가 되어 몇 초 안에 빨리 두어야 해서 나이든 이들의 노련함이나 집중력보다 순발력 등 젊은이들에게 유리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승부 측면으로 본다면 중국에 다소 밀리는 상황이죠.”

박 9단이 생각하는 대안은 있나요.
“국가대표 창설이라든지, 프로기사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있다면 충분히 중국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고 봅니다. 바둑이라는 자체를 본다면 예전처럼 인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요. 바둑계가 어떻게 하면 대중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양하게 바둑의 세계를 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결국 한국기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기가 없다면 바둑이라는 시장이 계속 작아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김연아 선수 같은 스타를 만들어 스타마케팅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곧바로 중국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관심과 지원에 놀랐습니다. 바둑도 고급 스포츠로 위상을 잡아가기를 기대합니다.”

김연아 선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박 9단도 세계대회에서 수상도 많이 하고 여성기사 중 가장 수입이 많은 기사인데 정작 국제대회 상금을 보니 너무 빈약하더군요. 얼마 전 선수당 1000억원대의 상금을 받은 국제 권투시합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세계대회 상금도 2000만~3000만원 수준이더군요. 대국료도 너무 저렴하다면서요.
“대중의 관심도가 낮으니 상금도 낮겠죠. 해외에서 받은 상금은 세금으로 거의 절반 이상이 나갑니다. 무엇보다 프로 기사들이 대국료로 생활이 되지를 않습니다. 프로대회에서 대국료 제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없어지는 추세거든요. 각종 기전이 상금제 위주로 바뀌면서 수입이 예전에 비해 줄어든 기사들이 적지 않죠. 모든 대회가 아직까지 체계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승부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더라도 ‘토너먼트 기사’ 보급이라든지 여러 방면에서 프로기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이것 또한 한국기원이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봅니다.”

바둑기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제가 프로생활을 한 지 19년째입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면 지금쯤이면 연봉도 늘고 차장, 부장 등 차근차근 승진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억울하기도 합니다. 반면 이제 32세인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나이면 직장에서 막 일을 배우고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전 정작 하산할 일만 남지 않았나라는 두려움도 들죠. 입신의 경지로 불리는 9단이 되면 사실 단의 숫자는 문제가 되지 않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둑은 아주 재미있고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또 체스게임의 경우 컴퓨터와 대결해서 컴퓨터가 이겼지만 바둑은 아직은 인간을 이긴 인공지능은 없습니다. 그만큼 판의 경우의 수가 엄청나기 때문이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생을 알려주는 바둑을 배운 것이 제게는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500승의 기록을 거둔 그의 뇌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바둑판의 기보가 담겨 있을까. 그런 놀라운 능력과 경력을 그는 소녀같이 앳된 얼굴과 청아한 미소로 감추고 있어 더욱 놀랍다. 그를 만난 후 어떤 상황에도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고 상대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바둑을 두는 이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도 조금은 더 공정하고 격조가 높아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꼼수가 아닌 정수를 두는 사회, 미생보다 완생이 되기를.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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