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삼풍아파트 붕괴사건 20주기다. ‘부패가 만든 지뢰밭’으로 불리며 1445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사건 이후에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국가나 기관의 부실한 관리나 부패 등으로 재난사건이 이어진다. 물리적 사건만이 아니라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2009년 신종플루(H1N1) 유행 당시에도 ‘집단적 공황’을 겪었다. 세월호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은 ‘국민 건강을 책임질 국가가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게 한다. 그런데 앞으로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홍콩독감이 기다리고 있단다. 세월호 침몰 직후 사고 피해자와 관련자의 정신건강 상담과 대국민 정신건강 보호에 앞장서 온 정신의학계는 메르스 감염사태와 관련해 “불필요한 동요를 하지 말고 성숙된 자세로 이 상황을 극복하자”며 대국민 정신건강지침을 발표했다. 서울 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이자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위원장인 채정호 교수를 만나 ‘재난과 불안의 시대에 살아남는 법’에 대해 물었다.

재난정신건강위원회는 언제 발족됐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합니까.

 “1년 전 세월호 사건 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유가족들이나 살아남은 학생, 승객은 물론 지역의 일반시민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 너무 극심했죠. 정신과 전문의 3000여명 가운데 10분의 1이 넘는 300여명이 그들을 상담하고 치유하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습니다. 전북 전주에서 매주 자동차로 달려와 상담을 한 의사도 있었고요. 택시기사분들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유가족을 태워주는 등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엔 ‘세월호 정국’이어서 정부가 뭐든 해줄 것 같았어요. 유가족에 대한 물질적 보상은 물론 정신건강에 대한 시스템도 확실히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각종 암 등 질병에 대한 의료시스템은 선진국 수준이지만 트라우마 등 오랜 시간과 관심이 필요한 전문적 세팅은 부족하거든요. 트라우마 치료는 하루에 100여명의 환자를 봐야 하는 저 같은 대학병원 의사나 교수들은 거의 불가능해서 ‘국립트라우마 센터’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동의해 4개의 법안도 만들어졌죠. 그런데…. 세월호와 관련한 정치적 이슈가 사그라지면서 물거품이 됐습니다. 세월호의 아픔은 여전한데 정부 차원에서 그들의 치유를 위한 연구비라도 좀 지원해주면 좋으련만, 정치권에서는 ‘표’가 안 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가 움직여야 모든 일이 되는데, 정치를 움직이는 일에는 한계가 있더군요. 그래서 일단 민간차원에서 의료인 70여명이 모여 위원회를 만들어 예방법도 발표하고 치유도 돕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에 절망한 이들이 직접 정치권에 뛰어들더군요. 교수님은 그런 생각은 없습니까. 내년이 총선인데….

“그런데 정치인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국회의원들은 개별적으로 만나면 다 훌륭한 분들인데 여의도에만 들어가면 좀 달라져서 저 역시 자신이 없습니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행복이고 애국이죠.”





메르스의 경우 환자보다 가족, 혹은 격리된 이들이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한 고통보다는 막연한 불안이 더 무서워서일까요.
“메르스 격리환자가 한때 1만여명을 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집에 가만히 있는 문화가 아니어서 ‘격리’됐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심리적 두려움이나 답답함도 있고,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도 많고, 자녀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에 스트레스가 심하더군요. 이럴 때는 자기가 가진 내재적 문제들이 심화돼 정신건강이 악화됩니다. 일상이 깨질 뿐더러 ‘나도 혹시 감염된 것 아닌가’ ‘곧 죽을지도 몰라’ 등 불안수준이 높아지면 열도 올라 심신건강이 무너지죠. 사회에서도 격리자를 환자 취급하거나 낙인 찍는 시각의 왜곡도 문제입니다. 정작 보건소에서 감시하는 것이 감사할 일인데도요. 그래서 우리 위원회에서는 격리자들과 전화상담도 해주며 안정감을 갖도록 돕습니다.”

특히 이번 메르스와 관련해서는 온갖 괴담이 무성했습니다. SNS의 발달 탓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난히 괴담, 유언비어가 많은 이유는 뭘까요.

“신뢰의 문제입니다. 정부나 국가를 못 믿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취약합니다. 어떤 위기상황이 생기면 정부의 발표능력이 유난히 떨어집니다. 부처간 조율도 안 되고, 정부 부처끼리도 소통이 되지 않고, 소소한 기본자료조차 공유가 되지 않죠. 무엇보다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좋지 않을 일부터 솔직하고 일관되게 공개하는 것이 위기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막연히 ‘메르스는 감기 정도 수준이다. 손만 잘 씻어도 안 걸린다’ 등의 낙관적 면부터 발표하고 계속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니 정부에 대한 불신만 키운 겁니다. 2003년 대구 지하철역 사건 때도 성금이 엄청 모였어요. 그런데 정부에서는 200여억원을 들여 ‘안전테마파크’를 만들었습니다. 그 예산의 10분의 1만 들여도 트라우마 센터를 만들어 각종 재난으로 상처를 받은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지속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데, 심리치유나 트라우마는 항상 중요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그래도 정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있지 않아요. 민간의 지원은 오래 지속되기가 어렵거든요.”


요즘 초등학생들도 ‘트라우마’라는 말을 쓸 만큼 우리 사회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 개에 물려 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등 온갖 일에 트라우마라는 말을 씁니다. 트라우마의 정의는 뭔가요.

“어떤 일이 일어난 이후에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나 인생이 바뀌는 것을 트라우마라고 봅니다. 스트레스는 그저 잠시의 충격이나 고통일 뿐 인생을 달라지게 하지는 않습니다. 자식을 잃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삶이 추락하거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대형사건을 겪을 확률은 10% 정도입니다. 선진국 미국도 총기난사 사건 등으로 8% 정도입니다. 그밖에 가족의 죽음, 배신, 파산 등 개인적 사건 등 모든 사람의 50%는 트라우마를 느낄 만한 사건을 체험하는데, 그 가운데 10분의 1이 환자가 됩니다. 전체의 5%죠. 세월호나 메르스의 경우 유가족들은 엄청난 트라우마를 느낍니다. 개인의 잘못보다는 시스템 때문에 재난을 겪었다는 분노, 그리고 가족을 잃은 아픔의 애도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례식만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 고인과 제대로 된 작별을 할 과정 등 복합애도가 필요합니다. 제가 트라우마 센터에 집착하는 이유는 센터를 만들면 전문가들이 모여 전문적인 치유과정을 만듭니다. 교육도 할 수 있고 인재도 양성할 수 있죠. 또 지방자치단체 등으로 확산돼 전 국민이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센터는 설립이나 유지에 많은 돈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의료비나 의료보험으로 적용되지 않는 치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민간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트라우마는 한 개인의 인생이 다 들어 있는 일입니다. 그 개인이 국민이고 사회조직원이기에 국민 개인의 건강이 곧 국가의 건강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는 11월에 정신과 전문의, 심리학자, 간호사, 사회복지 전문가 등이 모여 ‘한국 트라우마 스트레스 학회’를 창립할 예정입니다. 직역간 갈등과 밥그릇 싸움을 떠나 국가와 개인의 안전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치유방안을 만들 생각입니다. 안전사고를 막을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고, 재난 후의 상황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그럼 감염보다 트라우마가 더 심각한가요.
 “감염은 방역이나 예방이 가능하고 약이나 주사 등으로 회복이 가능합니다. 트라우마는 외상처럼 드러나지도 않고 특히 정신적 충격이나 심리적 상처는 몇 번의 상담과 약물로 낫지 않습니다. 전쟁 때 심리전문가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동료가 자기 눈앞에서 피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본 군인들은 평생 악몽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트라우마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이를극복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100만원을 잃어버려도 부유한 이들에게는 별 일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재난이 될 수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픔을 분석하고 이겨내는 ‘심리적 자원’이 부족합니다. 누군가 도와줘야 하죠. 물론 ‘외상후 성장’이라고, 심신의 상처를 받은 후 성장요인이 돼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도 밝게 사는 이지선씨가 대표적인 경우죠. 하지만 여전히 보통사람에게는 주변과 사회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애도에도 매뉴얼이 있습니까.
“세월호나 메르스 유가족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애도의 표현이 중요합니다. ‘슬퍼하지마, 그럴 수 있어, 인명은 재천이야’ 하는 식으로 위로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죠, 사실은 슬퍼할 수밖에 없다, 이건 굉장히 힘든 일이고 네가 슬퍼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태도가 제일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맞긴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함께 위로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무조건 빨리 떨쳐내버려라, 잊어버려라고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맞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애도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병적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개입이 달라져야겠지만. 사람에 따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애도라는 게 1~2년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은 평생 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자식이나 가족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생을 포기하고 남은 삶을 없앨 수는 없는 거거든요.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함께 울어주고 기도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 전문가이기도 하지만 국내의 대표적인 긍정심리학자입니다. 트라우마에서 갑자기 긍정심리로 경도한 이유가 있는지요.

 “제 의학적 전공은 트라우마입니다. 그런데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다 보니 우울증상이 사라져도 거의 대부분 재발하더군요. 약물이나 상담으로 잠시 우울증상은 치료되지만 삶의 의욕이 없으면 다시 재발합니다. 병원은 증상을 치료할 뿐이지만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존재가치를 찾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부정과 긍정은 각각 다르지만 같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도 긍정과 연결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병원의 치료시스템은 잘돼 있지만 인생관이나 삶의 가치를 다루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삶의 이유에 대한 문화가 오로지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만으로 국한된 것도 문제입니다. 건강하고 똑똑한데도 친구보다 성적이 나쁘면 우울하고, 취업난에 직장을 구해도 사촌동생이 대기업에 들어가면 가족에게 구박받아 우울해지는 등 너무 사회적 성공만 기준으로 삼다 보니 상대적 박탈감으로 병과 환자를 만드는 사회가 됐습니다. 이런 사회 덕분에 정신병자를 양산해 정신과 병원만 너무 성업 중입니다. 그래서 유전자나 환경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 자존감을 느끼고, 타인을 배려하고, 남의 마음을 읽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게 긍정심리학의 존재 이유입니다.”


학자들의 연구분석에 따르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50%가 유전적 요인, 10%가 가정환경 등 사회적 여건이라던데, 훈련과 노력만으로 긍정심리를 가질 수 있나요.

“유전자가 50%라고 하면 대부분은 20~30%는 갖고 있습니다. 40%만이 개인적 노력으로 가능하다 해도 그걸 충분히 활용하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시각과 습관을 가질 수 있죠.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감사 훈련과 자신의 강점 찾기입니다. 우리는 항상 단점을 지적하고 단점 보완을 강조하며 자기를 변화시키라고 강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넌 안돼’ ‘넌 그게 문제야’ 등 단점만 귀신같이 찾아내는 이들에게 시달립니다. 긍정심리학에서는 주관적 만족도를 높이고, 몰입과 열정을 갖게 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이 세 가지의 균형이 맞으면 행복한 삶입니다.”


교수님은 행복합니까.

“이 일(긍정심리학, 재난정신건강위원회)을 하기 전보다는 훨씬 행복해졌습니다. 의미있는 일을 하고 몰입해서 하니까요.” 채정호 교수는 국가나 정부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긍정적 개인과 긍정적 조직이 결합돼야 진정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내가 바뀌면 뭐해? 세상이 안 바뀌는데’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시스템의 변화 이전에 권력층부터 트라우마를 치유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성공과 좌절을 체험하며 트라우마를 겪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전염시키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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