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해?”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나.”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매일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의심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이며 연세대 공대 신소재학과 겸임교수인 박규호씨가 펴낸 <소담한 생각 밥상>이라는 책은 정말 오랜만에 ‘생각’이 무엇이며 생각하는 삶이 왜 소중한지를 알려준다. 사회 곳곳에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요즘, 매일 신문을 읽고 책을 읽으며 얻은 인문학적 소양으르 37년의 직장생활을 유지했다는 박규호 부사장을 만나 생각하는 삶의 비법을 들었다.





공기업 임원이 경영전략이나 성공기가 아니라 <소담한 생각 밥상>이라는 에세이집을 펴낸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년이 총선이어서인지 어떤 분은 ‘출마할 겁니까’라는 질문을 하더군요. 제가 올해 한전에 근무한 지 37년차입니다. 항상 적자생활, 늘 메모하고 적는 생활을 해와서 언젠가 남의 글을 적는 것이 아니라 제 글을 적어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침 우리 회사가 전남 나주로 옮기면서 혼자 생활하게 되어 정신적 여유도 생겨서 그동안 메모한 자료들, 생각들을 정리해 꼬박 석 달 반을 썼습니다. ‘밥상’이라는 제목에 각 항목을 에피타이저, 경영요리, 회사요리부터 디저트까지 요리로 나눈 것은 요즘 방송과 사회에서 ‘음식과 요리’가 화두여서 시류에 편승한 면도 있습니다. 밥상을 차린 식재료는 제 생활의 일부인 메모이고, 제가 매일 아침 10개 이상의 신문을 보면서 스크랩한 신문기사, 칼럼을 인용했습니다. 읽어보신 분들이 덕담을 해주시고 출판계가 불황이라는데 제법 잘 팔려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최근에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인문학 강좌나 독서포럼 등에 참여하는 기업 임원들은 많지만
직접 책을 쓰는 이들은 드문데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인가를 읽기를 좋아했던 거 같습니다. 지금은 한전에 근무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경북 상주의 산골집에서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호롱불에 의지해야 했죠. 읽을거리가 없었고, 집에 있는 책이라곤 아버지가 옆에 두고 읽던 한 권짜리 <삼국지>가 전부였지만요. 몇 번을 읽었지요. 그러고는 학교에서 배운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5학년 때인가 접한 동아전과가 유일한 참고서였던 기억입니다. 대학(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해서는 우리 대학만이 아니라 각 대학의 신문을 받아보았고 사서삼경을 배울 수 있던 것도 행운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근무하며 그 나라의 신문과 책들을 많이 읽은 것도 제 생각을 넓고 깊게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 마음껏 책을 못 읽어서인지 지금도 책에 대한 허기가 있습니다. 책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습관이 생겨 책만 보면 마구 사들이지요. 집사람의 핀잔을 받기도 하고, 읽지 않고 쌓아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구석구석 박스와 집 벽면 한쪽이 전부 책일 정도로 많아져서 이사 때마다 골머리를 앓곤 합니다. 작년 말 서울에 있던 본사가 나주로 이사함에 따라 가족과 떨어져 예상치 못한 독거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한편으로는 좋을 때도 있습니다. 경영진으로서 바쁜 회사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이 방 저 방 다니며 책을 읽는 순간은 저만의 힐링 방법이기도 하지요. 특히 훌륭한 분석과 탁월한 통찰력이 담긴 한 권의 책을 접할 때면 마치 저자와의 깊은 교감을 통해 지혜를 얻은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독서카드를 따로 만들어둔 것도 큰 힘이 되었죠.”



신문읽기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는데요. 직장생활하면서 그렇게 신문 읽기에 오랜 시간

을 투자하기가 쉬운가요.

“1990년쯤에 일본 주재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저를 아끼던 도쿄전력의 한 임원이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는 친구는 임원 되기 글렀다’고 하신 말씀은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원포인트 레슨이었지만 평생 신문 공부를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죠. 높은 주거비용 탓에, 심각한 주차난 때문에 도심 밖에 사는 일본의 경영자들은 집에서 업무 관련 기사를 모두 읽은 후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집에서 대강 신문을 읽어 핵심 사안을 파악한 후 지하철에서는 그날 할 일들을 구상하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바로 업무를 시작합니다. 저도 25년간 신문을 교과서로 삼았습니다. 신문을 읽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오려두었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버리고 새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소수의 힘있는 사람이 독점하고 행사했지만 지금은 고급에서 저급의 정보가 신문, 방송, 인터넷, 책의 형태로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누가 먼저 보고 구슬을 잘 꿰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어요.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쓸데없이 술과 밥을 사주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저는 신문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얻는 정보만으로 충분합니다. 제게는 신문이 교과서이고 정보의 보고인데, 요즘 사람들이 종이로 된 신문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아요.”



공부도 재능보다 습관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요.

“맞습니다. 일본 동경에 근무하면서 일본 특유의 기록하는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수시로 생각과 느낌을 메모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또한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다양한 강의를 들으면서 배운 훌륭한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고, 일상의 사소한 깨달음과 생각들도 오롯이 노트에 적었습니다. 이렇게 30여년간의 다양한 경험과 화두처럼 잡고 늘어지던 생각들이 <소담한 생각 밥상>이라는 요리가 되어 차려지게 된 것입니다. ‘총명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뛰어남도 잘 적는 무딘 붓만 못합니다. 많은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신만의 습관을 가지라고 후배들에게도 강조합니다. 기록이 쌓여 지식으로, 지식이 곰삭아 지혜가 되어 스스로를 성장시킨다고 확신합니다.”.






전기·전력 전문가인데 신문과 책에서 얻은 정보나 상식이 경영에도 도움이 됩니까.
 “그럼요.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기업설명회에서의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 수년째 적자상태인 회사를 이해시켜야 하는 일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 일본계 참가자가 다수 있었기에 유창하지는 않지만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적절히 사용하며 참가한 투자자와 애널리스트의 환심을 샀습니다. 스위스와 우리나라의 유사점도 이야기하고, 한국인들은 스위스를 최고의 여행국으로 가고 싶어하고, 스위스 민요와 요들송도 좋아한다고 했더니 한 번 불러보라고 하더군요. 같이 간 금융사 직원의 귀띔으로 ‘아름다운 베른에 맑은 시냇물이 넘쳐 흐르네’라는 구절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기업설명회에서도 딱딱한 업무 이야기보다 상대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훨씬 효과적입니다.”


 법대 출신인데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고, 연세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공부를 오래, 많이 합니까.

“제 개인적인 발전도 크고 직장에서 일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점과 선, 면으로 확대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두 번 읽거나 몇 번 들은 것을 ‘점’이라고 한다면 이를 격물치지, 즉 과학적 궁구를 통해 제대로 아는 것이 ‘선’의 단계입니다. 그리고 지속적 수양과 실천을 통해 ‘면’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나아가 다른 학문 간의 벽을 허물고 융합을 통해 이르는 입체적 이해까지 가면 최상인 것이죠. 원래 공부하는 것도 즐겁지만 사내에서 3년 정도 리더십 강사로 활동했는데, 스티븐 코비의 7가지 습관 등의 교육을 받는 등 따로 공부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제가 법학 전공이지만 한전 부사장이라고 하면 밖에서는 기술적인 부분도 물어봅니다. 그걸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저도 욕을 먹고 망신스럽지만 회사가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경영학 석사, 공대 박사 과정을 밟으며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같은 삼복더



위에는 전력량도 문제가 되고 정전되는 지역도 많습니다. 또 얼마 전

밀양송전탑에 관한 기고도 했던데 가장 밀접하면서도 가장 잘 모르는 것이 전기이고 한전이란 공기업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미국 LA에 출장을 갔는데 특급호텔에서도 정전이 되더군요. 사실 전기는 정전이 기본입니다. 외국은 정전 기사가 보도되지도 않을 정도죠. 과거 30년 동안 송전, 선로, 전력설비의 문제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는데 미래 30년은 아마도 대단한 발전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실 지하로 전기선을 매복하는 등의 방법도 있지만 비용이 너무 투자되고, 풍력발전도 엄청난 소음이 발생해서 네바다 사막처럼 광활한 지역이 아니면 효과를 보기 힘듭니다. 송전탑 역시 10년 전만 해도 부지를 선정하려면 어느 지역에서나 환영을 했는데 요즘은 결사반대가 심하죠. 그래서 송전탑 주변 지역에는 2000억원 정도의 보상을 해드립니다. 한 지역은 인구가 아주 적은데 보상비가 많이 나오기에 제가 농 삼아 이사 가겠다고 하니 오지 말랍니다. 수익이 줄어든다면서요.(웃음). 사회 전반의 갈등관리, 의식수준이 높아져 동반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전은 그동안 왜 그렇게 적자가 심했나요.

“5년 이상 전기요금을 안 올려서죠. 100원에 사와서 87원 정도에 팔아 왔으니 적자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전 자체의 경영혁신이나 각종 코스트다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민간기업 같으면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 다행히 현대자동차가 우리 건물을 구입해줘서 숨통이 트였습니다. 사실 일반가정의 전기요금의 경우 평균 290㎾, 월 3만원 정도의 전기료가 지출될 겁니다. 농어촌의 경우에는 할인도 큽니다. 휴대폰이 4인 가정의 경우 적어도 16만원 정도가 지출되는 것에 비하면 전깃값은 참 저렴한데….”



37년째 한전에 근무하고 현재 2인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롱런하는 비결이 뭔지요.

“요즘 같은 세태에는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일 겁니다. 비서실, 감사, 동경과 북경 주재원 등 19번이나 보직을 바꾸어서 각 분야를 고루고루 경험해서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또 너무 감사하게도 훌륭한 상사들을 모셨고 후배들에게도 많이 배웠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건이 터졌을 때는 우리나라 일이 아닌데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어느 일, 어떤 사람에게도 항상 뭔가 배우려고 했고, 사내 강의를 통해 그 배움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인간은 조직이든 개인이든 항상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저야 합니다. 영어로 책임을 뜻하는 responsibility라는 단어는 반응(response)과 능력(ability)의 합성어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인간은 동물적인 즉각적 반응보다 차분히 생각하고 상대와 공감하는 능력을 갖는 것, 그것이 책임감의 정의입니다. 저는 항상 제자리에서 제 일에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책에 직접 모신 사장들의 인물평도 썼던데 훌륭한 경영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 행운 중의 하나가 좋은 상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포스코 사장과 상공부 장관을 거쳐 한전 사장을 지낸 안병화 사장은 공기업 운영에 ‘관리’가 아닌 ‘경영’을 접목시키려 애쓴 경영자였습니다. 평생의 멘토로 여기는 강동석 전 장관은 진정한 ‘멋쟁이’셨고, 조환익 현 한전 사장은 ‘소통의 달인’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경영자의 조건은 중장기적인 명확한 비전 제시, 부하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올 수 있는 인격, 통찰력과 결단력입니다. 단순히 월급을 받는 의미의 전문경영인이 아닌, 평생직장의 개념으로 자율경영을 실천하는 진정한 프로여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경영자는 종합예술가가 아닐까요. 경영자는 우선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하며, 남을 시킬 줄도 알아야 하고,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이런 종합예술가가 많을 때 각 기업은 물론 대한민국도 발전할 겁니다.” 공기업 임원, 다독가라면 흔히 딱딱하거나 잘난 척 혼자 떠드는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은 개그프로에서 논어, 외국의 음식까지 겸손한 태도로 설명하는 그의 태도에서 깨졌다. ‘생각’과 ‘교양’으로 무장하고 차분하게 인문학과 한전의 문제를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갑자기 우리나라 전깃값이 별로 비싸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소통은 얼마나 힘이 큰가….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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