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일까. 왜 이제야일까. 여성가족부는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8월 12~23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독립을 향한 여성 영웅들의 행진’을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개최했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전시하고 있다. 8월에는 매주 토요일에 ‘잊혀진 여성독립운동가들, 누가 어떻게 싸웠나’ ‘대한의 여성, 구국을 위해 의열투쟁에 나서다’ 등 개별적 운동을 조명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오는 11월에 270여명의 여성독립운동가 인명사전도 발간한다. 방송에서도 여성독립투사를 다룬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100여년 전부터 조국 광복을 위해 생명까지 던졌는데 왜 새삼 그들의 존재를 궁금해할까. 물론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된 것은 올해가 광복 70주년이기도 하지만 최근 영화 <암살>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배우 전지현이 맡은 ‘안윤옥’이란 독립투사가 매력적으로 보인 덕도 크다. 한국근대여성사 연구학자이자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기획위원장인 신영숙씨를 만나 나라를 위해 힘썼지만 역사의 뒤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누구이며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봤다.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해에 발족돼 그동안 묻혀 있던 항일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한편 그들의 애국심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인지요.
“우선 여성독립운동가를 전공한 학자가 드물어 연구자료도 드물고 각종 기록은 더더욱 부족합니다. 우선 생존한 독립운동가 분들이 드물고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그렇듯 후손들조차 잘 드러나지 않아 기본 사료나 고증이 어렵습니다. 지인들조차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하시고…. 대부분 남성독립운동가들의 기록 속에서 그분들의 어머니, 아내, 딸들도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테니 그 자료를 찾는데, 논에서 이삭 줍듯 힘들게 찾고 있습니다. 물론 여성독립운동가만이 아니라 모든 근대 여성들의 자료가 부족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도 “기존의 독립운동사가 지나치게 명망가 중심으로 사료에만 입각해 서술돼 구체성과 생동감이 부족하고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소홀히 다뤄졌다”며 “회고록 출간이나 생존 역사인물에 대한 구술조사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동안은 왜 이런 생각이나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 사회나 학계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를 못 찾은 게 아니라 안 찾은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은 당연히 남성의 몫이라는 편견이 강하니 유관순 열사처럼 크게 주목받은 여성들을 제외하고 음지에서 숨어 활동한 이들에게는 관심도 갖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번에 서울방송에서 이미 포상까지 마친 여성독립운동가가 수십 년째 ‘남성’으로 분류돼 왔던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지요. 독립운동가 임수명(1894~1924) 선생의 이름은 국가보훈처가 공개한 여성독립운동가 266명의 명단에서 누락돼 있었습니다. 임 선생은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낸 신팔균 장군의 아내로 비밀문서 전달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한 분으로, 1990년 정부에서는 임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고 서훈을 내렸는데도 명단에서 임 선생의 이름이 빠진 것은 국가보훈처가 남성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랍니다. 후손들이 항의했는데도 여전히 수정되지 않고 있다더군요.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여성 248명 외에도 이름 없이 살다 간 무명씨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남성은 1만3509명인데 여성은 241명으로,2%에도 못 미칩니다.

“그건 남성독립운동가들이 공적과 역할이 더 뛰어나서만은 아닙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의 여성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광복군으로, 의열투쟁으로, 임시정부 임원으로, 가정을 짊어지고 독립자금을 마련하며 자녀를 독립운동의 일꾼으로 키워냈습니다. 1만3509명의 남성 독립군 곁에 어머니, 부인, 딸, 며느리, 이모, 누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여성 독립군들은 농사를 짓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군자금을 모으러 다녔고, 치마 속에 비밀서류 등을 감춰 전달했습니다. 총알 등의 군수물자를 보자기에 싸서 운반하기도 했죠. 유관순 열사를 비롯, 전국민이 아는 독립투사 외에도 기록조차 남지 않고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역사 속 진실을 찾아 그들의 혼을 기리고 현창해야 합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현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업적을 남겼답니다. 무장투쟁도 하고, 교육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남자와 동등한 애국을 했는데 그런 특별한 분들의 존재조차 모른다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이죠.”



신 선생이 연구한 분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꼽는다면.

“다들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신 분들이라 한두 분을 꼽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가장 소개하고 싶은 분은 조신성 여사(1874~1953)입니다. 평안북도 출신인데, 유복한 집안이지만 부모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고모 손에 자랐답니다. 당시 풍습에 따라 16세에 결혼했지만 22세에 자녀도 없이 과부가 돼 서울로 와서 교회에 다니며 이화고녀에서 공부하고 소학교 교사, 이화 기숙사 사감으로 일했어요. 이준 열사 부부와 친분을 맺어 조선부인회도 조직하고 국채보상운동도 하다 일본에 유학을 갔죠. 몸이 아파 귀국한 후 부산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는 어찌나 학생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란 노래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조신성이 놀던 달아’로 바꿔 부를 정도였답니다. 안창호 선생의 부탁으로 평양에 가서 그곳의 진명여고를 맡아 여학생을 몇 배로 늘린 여성교육운동가이고, 중국을 넘나들며 청년들을 모아 대한독립청년단의 여장군이 돼 군자금을 모으고 무장투쟁을 준비했습니다. 투옥돼서도 옥중에서 만난 교도관을 단원 삼아 선전물을 만들고 일본 관헌을 협박하거나 관청을 폭파하고, 일본 관리 임금을 실은 운반차를 습격해 관비를 탈취, 상해 임정을 돕는 등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다시 감옥에 잡혀갔다 출옥한후 고향에서 인재 양성 등으로 일생을 다했습니다. 조신성 선생은 짧은 시간에 불꽃처럼 살다 스러진 것이 아니라 평생 여성과 민족을 위한 발자취를 넓고 깊게 남긴 분입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분한 안윤옥이란 가상의 독립운동가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몰래 군자금을 전하거나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처럼 총을 든 저격수여서일 겁니다. 현실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까.

“많은 분들이 ‘암살’의 저격수 안윤옥의 실제 모델로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1872~1933)을 떠올립니다. 서대문형무소 기념관에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성우들의 도움으로 육성처럼 들려주고 있는데요. 남자현 선생의 입을 빌린 삶은 이렇습니다.


‘을미년에 민중전께서 돌아가고 사람들이 크게 들고 일어났어. 1895년 을미의병 말이지. 내 남편 또한 그해 의병으로 나갔다가 며칠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놈들 총에 세상을 떠났어. 남편은 온통 피투성이었지. 나는 남편이 입고 있던 피묻은 삼베 적삼을 벗겨내서 입었어. 3·1운동 때도 청산리전투에 나갈 때도, 나는 그 적삼을 벗지 않았어. 잠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러 떠나는 길에도 남편과 함께했지. 삼베 적삼은 나의 방패였고, 나의 깃발이었고, 나의 남편이었고, 그리고 나였어.’


남자현 선생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저격수였어요. 그래서 암살을 두 번씩이나 계획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항일의병인 남편이 전사했는데도 울분을 참으며 시어머니 모시고 3대 독자인 유복자를 키우며 누에 치고 명주 짜서 생계를 이어간 억척주부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바로 상경해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항일구국의 길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만주로 넘어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사들 뒷바라지도 하고,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했어요. 1933년 초엔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를 제거하기로 하고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에서 창춘으로 가기 위해 떠났지만 미행하던 일본영사관 소속 형사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힙니다. 옥중에서 15일 동안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생활로 사경에 이르자 일경은 보석으로 석방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유복자인 아들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독립축하금으로 이 돈을 희사하라’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효부, 열녀, 열사 등 지조와 도덕·예지와 의용이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여사. 인격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며 일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해 싸우다 가신 진정한 애국자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로 국가의 서훈을 받으려면 어떤 과정이나 자료가 필요합니까.
 “그게 참 복잡합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총무처장을 지냈던 차리석 선생의 부인 홍매영 여사의 경우, 남편을 내조하고 독립군을 도운 공로도 있고 김구 선생이 만든 ‘독립당’의 당원증도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는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늦둥이 아들(차영조)을 잘 키웠고요. 그 아들이 당원증을 보훈처에 제출했는데도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답니다. 기준이 애매모호해서 답답한 경우가 많아요.”


사진 기록이나 당시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은 없나요.

“참 슬프게도 독립운동가들은 남녀 불문 가족들의 안녕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손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교육도 받지 못해 궁핍한 생활을 하느라 자료 보관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후에 분실, 소실된 자료도 많고요. 조선총독부 당시 창고에 엄청난 자료가 있다는데 그걸 발굴, 연구하는 이들이 드물답니다. 독립운동가들만이 아니라 군위안부 문제도 자료 발굴이 부족해요. 그건 개인이 단기간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후원해서 장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40여년간 연구해온 근대 여성사 연구도 ‘유행’을 탑니다. 2000년 무렵엔 위안부 문제에만 편중돼 다른 분야는 묻힌 경향이 있습니다. 제 석사논문이 ‘근우회’인데 그동안 손놓고 있다가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 참여하면서 다시 돌아온 셈입니다.”


이번에 일제강점기 한국여성사를 시로 노래한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란 책을 펴냈죠?
 “사실 저도 연구자이지만 열심히 연구를 해도 딱딱하고 어려운 연구논문을 누가 읽겠어요. 일제강점기 최초의 시집을 낸 여류시인이자 소설가, 배우이고 여성운동가였던 김명순씨의 경우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의 실제 모델로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여성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실상은 이응준이란 군인과 산책하다 강간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것이 알려져 진명여고 졸업생 명단에서도 지워질 만큼 치욕의 삶을 살았습니다. 연구논문까지 나왔지만 대중들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중학생들까지 쉽게 읽도록 시를 써서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여성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논문은 학자들이라도 읽지만 시는 아무도 안 읽는다네요. 그래도 계속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저술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

 신영숙 선생은 북한 출신이라거나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더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성독립운동가 이병희 선생(1918~2012)은 사망 전 ‘(일본인들이) 자궁에 막대기를 넣고 휘저은 고문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차라리 죽이라고 했다. 나라를 구하려면 자기 목숨 내놓아야지’라고 회고했다. 아내로, 어머니로, 며느리로 최선을 다하면서도 재산은 물론 성고문도 당하고 목숨까지 다 내놓았던 그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무사히 살고 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이제라도 그분들의 정신을 다시 기려야 하지 않을까.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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