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 작가 최인호 선생의 독자 사인회에 갔다. 

최선생은 신작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20여만부가 팔리자 독자들이 너무 고맙다며 보은의 뜻으로 직접 만나 사인을 해주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전국 주요도시를 누비며 한단다. 68세의 암투병환자가 말이다.
 

                                                                    <경향신문 DB>

이미 그 책을 읽었지만 그 분을 직접 뵙고 싶었다. ‘영원한 청년’이 암에 걸려 노인 모습을 하고, 또 마치 영혼이 매혹된듯 써내려간 새로운 작품을 쓰고 난 후의 표정이 궁금했다. 서점에서 새로 책을 다시 구입하고, 그 분이 피곤하고 목이 마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근처 백화점에 들러 블루베리 주스 한 병을 샀다. 그리고 이미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독자들처럼 줄을 서서 기다렸다.


아이돌 스타의 팬 사인회와는 달리 대부분 40대가 넘은, 혹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독자들이 최선생의 책을 가슴에 꼭 품고 정신없이 붐비고 공기도 탁하고 산만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오롯이 자신들의 토요일 오후를 헌납(?)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곧 스타가 등장할 거라는 부푼 기대감이 아니라, 과연 그 분이 무사히 나타날까. 혹은 몇년동안 암투병중이라는데 어떤 모습일까를 걱정하는 표정들이었다.


서점인지 출판사 소속인지 한 남자직원이 독자들의 이름을 물어 보며 포스트잇에 써서 책 앞에 붙여 주었다. 아마 독자의 이름을 묻고 말하고 듣고 적는 시간과 수고를 줄이기 위한 배려였으리라. 아픈 분이 그냥 대충 자기 이름만 사인해주면 되련만 이름까지 꼬박꼬박 적어주겠다니, 손목이 아프지 않을지 지치진 않을지, 그리고 이렇게 사인회를 하는데 주말 오후라 독자들이 휴가를 떠나거나 약속이 있어 별로 안 모이는건 아닌지 등등 노파심이 들었다..
 

                                                                     <경향신문 DB>
 
잠시 후, 주인공인 최인호 선생이 등장했다. 독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그들이 던지는 인사에 감사해하고 요청하는 이들과 일어서서 사진까지 찍어주셨다. 내 차례가 왔다. 책을 내밀자 선생은 날 알아보셨다.


“하이쿠, 어떻게 왔어요. 성봉이한테(여백 출판사 사장) 얘기 듣고 있어요.”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어 더 이상 말을 시키기 안쓰러웠다. 난 손주 주려고 시골에서 감자와 식혜를 싸온 할머니처럼 블루베리 주스를 내밀며 “목마를 때 이걸 드세요. 건안하시고요”라고 짧게 말하고 왔다. 최인호 선생은 책에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써주셨다.


멀리서 지켜보니 “선생님, 아프지 마세요” “이렇게 좋은 책을 써주셔서 감사해요” 등등 독자들의 안부와 덕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도 없었겠지만 혹여라도 초라한 사인회가 될까봐 맘졸였던 것은 기우였다. 자신과 함께 나이든 독자를 만난 최선생의 표정엔 수많은 상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일일이 인사하고 사인해주고 사진도 찍어주고 정치인들도 지친다는 악수까지 해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인호 선생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독자로서 ‘작가 최인호’를 만난 것은 신문에 연재되던 <별들의 고향>이란 소설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솜씨를 인정받고 26세에 조선일보 신문소설 연재 작가가 되고 <바보들의 행진><고래사냥> 등의 책이 영화화되면서 그는 청춘문화의 기수, 아이콘이 됐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그의 작품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 나는 부지런히 읽었다. 순정만화같은 <천국의 계단>을 읽고 어찌나 펑펑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붓기도 했고 샘터에 연재되는 <가족>이란 에세이형식의 소설을 읽으면서 괜히 그와 친하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종 매스컴에서 보여지는 그의 태도는 좋게 표현하면 21세기형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솔직하고 자의식이 강했다. 작은 키에 곱슬머리, 옹니, 모든 단어를 스타카토처럼 발음하는 강하고 속사포처럼 빠른 말투, 유난히 큰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 유머감각과 숨기지 않는 자부심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리고 기자가 되어 드디어 최인호 선생을 만났다. 프랑스에 살던 배우 윤정희씨가 귀국해서 함께 대담하는 기사를 담당하게 됐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을 때인데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 당시 즐겨 가시건 골프연습장에 부탁해서 여렵게 성사된 자리였다.아마 그 때 그 분의 나이가 갓 마흔이었으리라. 40이전에 최선생은 최고의 명성을 누렸지만 그의 소설이 워낙 대중들에게 인기여서 대중작가란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타인의 방>등 문학성 넘치는 작품보다 소설과 영화, 각종 활동으로 너무 대중적인 유명세가 커서인지 자신이 누리는 명성보다 작가로서의 부당한 대접에 많이 억울해하는 모습이었다.

 
나이를 믿기 어려울만큼 젊은 외모와 의식, 거침없는 태도, 파안대소하는 모습, 시종 시니컬한 말투가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솔직히 최인호 선생보다 윤정희씨 곁을 지키는 백건우 선생의 우아하고 점쟎고 과묵함에 매료되어 혼자 콩당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 무렵, 최인호 선생을 만난 소감을 묻는 친구에게 난 아마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분명히 천재같긴한데 자기가 천재인걸 알더라구. 드럽게 잘난 척 하던걸?”


그후 최인호 선생은 참 많은 경험을 한다. 작가로서의 왕성한 활동만큼이나 교통사고, 당뇨 등의 투병, 가톨릭에 귀의하기, 할아버지되기 등의 과정을 겪으셨다몇번의 만남은 있었지만 다시 그 분과 인터뷰한 것은 2005년, 해방 60년을 맞아 해방동이인 그 분의 입을 통해 한국의 근대사를 듣고 싶어서였다.

당시 뉴스메이커(현재 주간경향) 편집장으로 매주 <유인경이 만난 사람>이란 인터뷰 코너에 그 분을 모셨다. 신문 2곳에 매일 연재소설을 쓰고 텔레비젼의 특집 프로에 참여하기 위해 외국 출장을 떠나기 직전이었는데도 황송하게 나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주셨다. 2005년, 그 분을 만나고 쓴 기사다.

@신생 대한민국과 동갑인 해방둥이
 

작가 최인호는 해방둥이다. 온 국민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광복의 감격이 식기 전인 1945년 10월에 태어났다. 2005년이 해방 60년이란 역사적 의미만큼이나 아직도 ‘청년문화의 기수’로 기억되는 최인호씨가 환갑이 된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서울 한남동의 여백출판사에 있는 집필실에서 만난 최인호씨는 방부제로 세수를 하는지, 뜨거운 열정이 세월의 흔적을 지우는지 해외출장을 위해 2주간의 신문 연재소설을 쓰느라 무리를 했다는데도 여전히 젊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20여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보다 흰머리를 나풀거리는 지금이 훨씬 더 근사해 보인다.

30, 40대의 그는 문단과 영화계의 최고스타였고 너무 하는 일이 많아서인지 조급하고 짜증스러워 보였는데 환갑의 그는 여유와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겨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아, 근사하게 늙어간다니 참 고맙네요. 젊었을 땐 나처럼 욕심이 많은 사람도 없었을 거예요. 마치 줄이 너무 많이 연결되어 누전될 위험이 많은 전선 같았죠. 나이 들어서 욕망의 가닥이 정리정돈되어서인지 단순한 삶이라 집중도도 높고 전압도 높아진 느낌이에요. 요즘 들어 행복하다는 걸 자주 느껴요."

개인적으로 행복하다지만 해방 60년, 갑년을 맞는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부모님의 고향은 평양. 임신중독증 걸려 죽을 뻔하면서도 그의 어머니는 남하하는 외삼촌을 따라 만삭의 몸으로 서울로 와서 광복 두달 후에 그를 낳았다. 신생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해방둥이 그의 인생이야말고 대한민국의 역사와 일치한다.    

눈뜨자마자 국토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다섯 살 무렵에 겪은 6-25전쟁. 폐허 같은 도시풍경과 지독한 가난.... 서울중학교에 들어가자 4-19가 일어났고 고등학교 때는 학교가는 길에 어두운 날에도 색안경을 낀 까무잡잡한 군인 하나가 혁명공약 방송하는 것을 들었다. 친구들 몇몇은 월남전에 참가했고 몇몇은 군사독재 데모를 했다.
 유신을 선포하던 1972년. 그는 ‘별들의 고향’이란 신문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계엄군이 퇴폐적이라고 소설을 반가량 잘라버리기도 했다. 시인 김지하 때문에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돌아왔다.

그후로 그 웃지 않던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것도 지켜봤고, 건국 이래 최대행사라던 올림픽이 한강변에서 열리더니 대통령이 절로 쫓겨가는 것도 보고 군인이 아닌 ‘영삼이 아저씨’에게 투표해서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감격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OECD가입국이 되었다는 뿌듯함을 실감하기도 전에 외환위기가 닥쳤고 도처에 망하거나 실직하는 이들을 보다가 무사히 버틴 친구들마저 정년퇴직해버렸다.

그 사이에 그는 천재문학소년에서 청년문화의 기수, 퇴폐적 작가에서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작가, 다시 역사소설 작가로 변신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작가들조차 체제, 반체제로 나눠요. 전 일찌감치 ‘나는 비체제’라고 선언했어요. 한때 저는 체제 쪽에서 보면 퇴폐작가였고 반체제 쪽에서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쪽에도 안 속하고 보니 이제 와서야 정당화되고 인기만발이군요. 저번 선거때는 하도 와달라는 곳이 많아 곤혹스러웠어요. 이젠 비체제가 효용가치가 있다나요."  

별로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해방 60년의 역사적 의미부여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도 최인호씨는 "해마다 광복절은 오지만 우리는 광복도, 해방도 아직 오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제일 치명적인 것이 6-25전쟁이다. 우리 민족끼리 싸우고 피흘렸지만 결국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인 더러운 전쟁(Dirty War)이었고 그 아픔은 아직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본이다. 아직도 2차대전에 대한 반성이 없고 총리는 신사참배를 하고도 사죄하지 않는다.

"전 데모를 싫어하지만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신대할머니들의 시위에는 참여해 그냥 서 있기라도 하고 싶어요. 왜 그 강대국이란 나라, 세계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비겁하게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는 겁니까? 그런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해요. 6-25전쟁이란 업둥이를 내려놔야 우리 민족의 상처와 미성숙함이 치유될 겁니다."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역사 공부를 하면서 정말 우리 민족이 정말 괜찮고 대단한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고 언젠가 세계 중심에 설 것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뚜렷한 근거가 있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말했다."대한민국 인구가 4천5백만명인데 각 종교단체에서 집계한 신도 수는 6천만, 7천만명이 넘어요. 정말 각종 신을 섬기는 종교천국이죠. 또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수천명의 순교자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만약 하느님, 아니 신들이 있다면 이렇게 열심히 믿는 국민들이 사는 나라를 안 돌보시겠어요?"        

그의 평화로운 표정의 이유를 알겠다. 그는 1987년 가톨릭에 입문해 가톨릭 관련 묵상집 등을 써서 가톨릭문학상을 받았고 한국 불교계의 거봉 경허스님을 그린 ‘길없는 길’ 등으로 불교문학상도 받았다. 요즘은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유림’이란 소설을 연재하고 있어 유교, 불교, 가톨릭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뿐인가.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파헤친 잃어버린 왕국(1986),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왕도의 비밀’(1995), 신라 해상왕 장보고를 그린 ‘해신’,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을 소설화한 ‘상도’(2000). 현재 부산일보에 연재 중인 가야소설 ‘제4의 제국’을 더하면 ‘조상들에게 진 빚도 다 갚는 셈’이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조사하고 연구하고 새롭게 발견해서 멋지고 근사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는데 그 조상들이 자기를 도우면 도왔지 왜 미워하겠냐는 것.
"여백의 김성봉 사장이 ‘상도’를 출판하고서 잘 팔릴까 걱정하기에 제가 그랬죠. 그 부자 상인이 비록 죽었다 해도 날 도와줄 길이 뭐가 있겠냐. 돈이나 많이 벌게 해주겠지."‘상도’는 3백여만부가 팔려 창작소설로는 최대의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그는 인세만으로 부자가 되었다. 아, 같은 글을 써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사. 그것도 대부분 비난하는 기사만 써대는 기자들은 그런 은총을 받기는커녕 저주나 받으니 소설가란 얼마나 축복받은 직업인가.   

@심청이를 배우자

서울고 2학년때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입선으로 문단에 소개된 후 그는 ‘기록을 만드는 남자’란 별명을 얻었다. 26세에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 신문연재 소설을 써서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그후 ‘바보들의 행진’ 등 숱한 영화제작에도 참여했고 환갑을 맞는 지금까지도 "불임수술을 안 해 자꾸 아이를 만드는 여자"처럼 다작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재작가’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도대체 저 사람은 무슨 약을 먹기에 저렇게 열정이 넘치냐" 하는 궁금증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의문이 떠오르면 현장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내 몸에 열정이 있고 허락된 건강이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하단다. 궁금해하는 인물과 내용을 찾아간 현장에서 답과 연결고리를 찾게 되면 신비함마저 느낀다. 그 희열이 비아그라나 보톡스보다 훨씬 그에겐 효과적인 치유제이고 젊음을 유지시키는 불로초이다.

경허스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수덕사에서 3년간 머문다거나 중국, 일본 등을 수없이 찾아가고 자료를 얻기 위해 각종 고문서를 뒤지는 열정을 보이는 최인호씨를 보고 한 학자는 "우리나라 학자들은 최인호를 보고 반성해야 한다. 온힘을 쏟아부어 하나씩 맞춰가는 조각그림 덕분에 역사는 그저 과거의 어둠속에 묻혀 있지 않고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곧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인도로 가는 그는 3, 4년 후에는 예수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날 예정이다. 2000년 전에 태어난 목수. 겨우 3년 동안 활동하고도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그 남자를 파헤치기 위해, 남들이 전혀 다뤄보지 않은 각도에서 최인호식으로 그를 해석하기 위해서다. 또 피카소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임신’ 중이다. 천하의 패륜아이고 예술가이면서도 돈을 밝혔고 팔순 넘어서도 여자들이 줄을 이었던 피카소를 통해 새로운 애정소설을 만들 생각이란다. 그러면서 문득 21세기 우리의 화두는 ‘심청이’라고 강조했다.

"심봉사는 눈을 뜨게 해준다는 말에 솔깃해 공양미 3백석을 약속하죠. 심청이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요. 하지만 공양미를 바쳐도 심봉사는 눈을 뜨지 못했고 왕비가 되어 돌아온 심청이가 주최한 봉사 잔치에 가서 심청이를 만나고서야 눈을 떴어요. 진정으로 심봉사가 심청이를 사랑했다면 공양미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항상 공양미 3백석처럼 기막힌 방법이, 수단이 있어야만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핑계를 대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려면 진심으로 그리워하면 되는데도요. 우리는 이데올로기, 정책 등 공양미 같은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편견을 버려야 해요. 또 심청이처럼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으로 풀어야 정치건 남북문제건 해결될 겁니다."

장발단속을 피해 골목길로 도망가고 청바지를 입고 생맥주를 마시던 청년문화의 기수, 호스테스를 여주인공으로 했다고 퇴폐문화의 괴수란 비난도 받았던 그는 이제 학자들로부터도 존경받는 작가가 되었다. 

물론 그는 그런 존경을 거부한다. 작가란 영원한 개인이고 극도의 이기주의자이지 절대 박애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인도 캘커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을 보듬는 성자들을 관찰해 글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직접 성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족의 죽음조차 온몸으로 몰입하기보다 ‘이걸 어떻게 표현하고 묘사할까’를 궁리하며 철저한 관찰해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란다. 그래도 그런 저주는 그의 탁월한 재능과 열정을 통하면 아름답고 훌륭한 문학작품이 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때론 새로 거듭하게 한다. 그 역시 자신이 문학이란 장르에 불어넣는 입김에 영성이 깃들기를 바란다. 피노키오가 목각인형에서 마침내 인간이 되었듯이.          

청바지-장발, 통기타와 생맥주로 대변되는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인 그도 이젠 환갑이 되고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런 유치한 짓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면서 지갑 속에 넣어준 외손녀의 사진을 보여주고, 동갑내기 아내가 ‘여보, 밥 먹어’라고 할 때마다 신비함과 경외심을 느낀다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최인호씨.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선 굵은 역사소설을 써도 그에겐 여전히 ‘별들의 고향’의 경아가 면류관처럼 얹혀 있다. "경아가 너무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처음엔 업보처럼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내 분신 같고 뭉클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음 밝힌다는 비밀을 전해주었다. "고등학교 때 첫사랑 이름이 인경이어서 경아라고 이름을 지은 거예요." 그 인경씨도, 소설에서 죽은 경아도 살아 있었으면 환갑 할머니련만 진짜 환갑을 맞는 최인호씨는 여전히 청년이다. (2005년 1월)  



<경향신문 DB>

최인호 선생의 작품중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책은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란 책이다. 어머니가 불러준 자장가가 영원하듯 우리에게 최인호란 작가도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가 아닐까.비록 그가 환갑 칠순 여든이 넘어도, 혹은 죽더라도 우리는 중학시절에 읽은 그의 소설, 여고시절에 본 그의 영화, 나이들어서 읽은 그의 책을 통해 그의 문학정신을 영원히 기억해낸다. 작가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인 것 같다.

한 인터뷰에서 “내년 만우절날,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암투병에 대한 고통조차 유머로 표현한 최인호 선생. 카랑카랑하고 커다랗던 그의 목소리는 약해지고 쉬었지만 그의 정신은 절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형형한 눈빛은 더욱 깊어지고, 그의 표정은 더욱 따스해졌다.

무더운 여름날, 독자를 위해 사인을 하는 작가를 보며 ‘위대한 오후’란 말이 떠올랐다. 한낮의 뜨거운 열정은 아니지만, 정말 충실하게 하루를 보낸 후에 맞이하는 붉은 노을과 여유로움을 그에게서 봤다. 최인호 선생님, 내년 만우절에 다시 만나요....


저작자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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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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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수부지 2011/07/30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16일광화문교보에서의 최인호작가님의 위대한 오후의첫행사에 길게늘어선 줄에 서서 최인호작가님의사인도받고 작가님의 책대박과 건강을 기원했습니다^^내년 만우절에 최인호선생님을 꼭 만나세요!

  2. 모브 2011/07/31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천득선생님 소식부터인가,,언제부턴가 내 청춘에 한자리를 차지했었던 나에게 위대한 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심지어 지난해 친정엄마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전 마흔을 넘기고 있습니다.외롭다기보다는 무섭다는 느낌때문에 하루하루가 많이 힘든, 위기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중입니다.그 와중에도 일주일에 한번 유인경기자님의 글은 위안도 되고 꺼리도 되고..유기자님이 각별했던 지인분들을 떠내보내는 글을,추억하는 글을 보며 제법 추스리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최인호님 또한 '가족'때문에 저 또한 친한 착각을 느끼며 얼마나 긴 세월을 제 시간안에 계셨었는데 투병중이라는 얘기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하지만 오늘 또 유기자님의 글을 통해 사람과 '관계'하는 법을 또 배웁니다.저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제가 존경하던 분들과 유기자님처럼 직접적으로 연을 맺진 않았지만 마음에 담아두는 법이나 아끼는 방법들을 조용히 배우고 있습니다.최인호님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3. 유인경 2011/07/31 2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0대를 통과하시는군요. 50대가 되고보니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할 수있는지 알겠더군요.
    그래서 60대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나이의식하지 않고 제 감정에 충실하고, 실수해도 자책하지 않고, 순간순간 감사하려고 합니다.
    많은 인사들을 만나는 것이 기자란 직업의 축복이긴 하지만, 그 인연 덕분에 슬픔도 참 많이 느낍니다. 슬픔 또한 아름다운 체험이기에 감사하려 합니다. 뒤늦었지만 친정어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4. 흐난수기 2011/08/01 1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잊었던 최인호 작가를 다시 기억하면서........
    글을 읽고 있어요. 젊은 시절 마구 읽어 내려갔던
    기억을 버리고 다시 읽으니 새맛이 느껴집니다.
    저랑 같은 해방동이에게 같은 시대를 살게된 애틋함을
    느낍니다.

  5. 남한산성 2011/08/01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젊은날, 내 초상화의 뒷 언저리에 최인호님이 함께 하는데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에 마음이 너무도 안타깝군요!

    세상의 끈을 놓고 싶었을때
    샘터에 실린 최선생의 "가족"을 읽으며 내 마음을 추스릴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답니다.
    최인호님!
    부디 우리 곁에 조금이라도 더 계셔주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6. 글라라 2011/08/12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 박완서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어려서는 그냥 작품으로 읽었는데 지금은 다른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모쪼록 건강하셔서 우리곁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할께요

  7. 글라라 2011/08/12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 박완서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분입니다
    어려서는 그냥 작품으로 읽었는데 지금은 다른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모쪼록 건강하셔서 우리곁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할께요

  8. 요세피나 2011/08/13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경님 덕분에 최인호님의 근황을 알았네요.
    부디 건강하시길......

  9. craftmatic adjustable beds prices 2011/12/28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는, 오, 부드러운 기질, 연료, 노력 좋아요.

  10. 자스민 2013/09/26 0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기자 글 참 좋네요,,, 방송에서 가끔 봤지만 이렇게 긴 인터뷰 기사를 읽은 건 처음입니다. 최작가를 어떻게 보셨는 지 궁금했습니다. 내용에 모두 공감합니다. 기자님도 건안하셔요~~

  11. 명동DJ 2013/09/26 2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인호선생이 떠나시고 난 지금,
    그분의 소설들을 읽으며 젊은시절을 보낸 내가 그분과의 인터뷰기사를 보며
    내 젊은 날의 추억들을 더듬어 봅니다.
    최인호선생의 영전에 마음의 근조화한을 바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