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만해도 동네에 양복점이 흔했다. ‘○○라사’ ‘○○테일러’ 등의 간판을 단 그 양복점에서 사람들은 첫 직장 출근복이나 결혼할 때의 예복, 혹은 예단 정장 등을 맞춰 입었다. 
 
양복점 주인들은 “철수가 취직했구나. 장하다. 내가 멋진 옷을 만들어주마”라며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줬고 재단·바느질 솜씨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1990년대 이후 소비자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기성복, 또 해외 명품브랜드를 선호하면서 양복점은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최근 다시 ‘맞춤양복’이 인기다. 제일모직의 최고급 맞춤양복 ‘란스미어’를 비롯해 엘지패션과 코오롱 등 재벌기업에서 다투어 고급 맞춤양복 전문점을 선보이며 맞춤양복 시장에 불이 붙었다. 특히 란스미어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공식석상에 자주 입고 나와 ‘이건희 양복’이란 애칭(?)도 얻었다. 드라마에서 김희애나 김남주가 입은 옷들이 주부들 사이에 완판되는 것처럼 재벌총수의 기운을 느끼고 싶은 남성들이 줄을 잇는단다. 패션사의 한 임원은 “고급 맞춤양복은 대부분 선물용이어서 불황도 없다”고 말했다. 한 벌에 수백만원짜리 양복을 선물하는 건 거의 ‘뇌물’ 수준이다. 

‘고급 맞춤양복’의 등장은 예견된 일이다. 상류층은 자기 신분과시를 위해 소비하고, 중산층은 상류층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상류층의 물건을 소비하는 시대다. 이러한 욕망 속에서 옷은 생필품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과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래서 상류층은 언제나 자신들을 추격해오고 비슷해지려는 중간계급을 따돌리려 한다. 조지오 아르마니, 발렌티노 등의 명품도 이젠 중산층이 백화점에서 24개월 할부로 구입하거나 세일 때 사입기 때문에 ‘기성복’은 더 이상 자신들이 상류층임을 보여주는 ‘기호’가 아니다. 이런 욕구를 충족해주는 것이 ‘최고급’ 맞춤양복인 것이다. 

설자리를 잃어가는 군소 맞춤양복업자들로 구성된 단체들에서 “대기업이 맞춤양복 시장까지 독식할 거냐”며 사업 중단을 요청했지만 “우린 동네양복점과 달리 한벌당 200만원 이상의 제품만 만들어 차원이 다르다”는 답만 들었단다. 상류층, 귀족계급의 품위를 뜻하는 ‘Distinction’은 원래 ‘남과 구별됨’이라는 의미다. 품위있는 행동과 재산환원으로 사회의 전범이 돼야 할 재벌그룹이 얼마 남지 않은 동네 맞춤양복점들의 밥그릇까지 뺏는 건 아무래도 치졸하다. ‘너희들이 만들고 입는 옷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의도가 담긴 답변조차 기분이 나쁘다.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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