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 중순 무렵이면 수첩을 산다. 15년째 똑같은 수첩이다. 12월 중순에는 신년 다이어리를 할인해주기 때문에 5000원 정도의 가격에 새 수첩을 장만할 수 있다. 짜장면 한 그릇값으로 1년을 기록할 수 있는 물건을 산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아, 나의 소심한 알뜰함...)

명품 브랜드에서도 다이어리가 나오고, 겉이 가죽이나 양피로 된 것, 장인이 한땀한땀 만든 것, 세련된 디자인의 제품 등 다양한 종류가 많은데 내게는 비닐코팅된 국산 양지수첩이 최고·최선·최상의 수첩이다.

외국산과 달리 한국산이라 한국 국경일과 휴일이 정확하고, 중요기관 전화번호 지하철 노선도까지 요긴한 생활정보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음력이 들어있어 엄마 기일이나 제사 등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다.

새 수첩을 구입한 후에는 리모델링을 한다. 매일 수십번씩 들춰 겉이 닳고 속이 튿어지기 쉬운지라 겉은 투명테이프로 감싸고 속지에도 테이프를 붙여 견고하게 만든다. 유치찬란한 나의 취향을 감출 수 없어 어느 해에는 내가 좋아하는 소피아 로렌의 사진을 책 표지처럼 붙여놓기도 하고, 제발 재수가 좋으라고 화투의 8광을 붙인 적도 있다. 2년전에는 신비한 분위기에 절대 말이 없는 모나리자의 그림을 표지로 만들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더욱 튼튼함을 강화하기(?) 위해 연탄가스가 누출될까봐 방 틈에 붙이는 초록빛 가스방테이프를 붙였더니 시력이 별로 좋지 않은 이들이 “루이뷔통 제품이냐”고 물어 한참 웃었다. 그무렵 거친 가로줄 무늬의 루이뷔통 가방이 유행할 때였다. 그런 수첩을 꺼내들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나의 촌스런 수첩이 참 마음에 든다.

몇년전까지는 해마다 그 해에 꼭 이루고 싶은 일들을 첫 장에 격문처럼 적었다. 내 집 마련, 살 빼기, 말 줄이기, 매일 1권씩 책 읽기, 내 서재꾸미기, 봉사활둥하기 등등... 요즘은 그냥 담담하게 새해를 맞는다. 희망과 꿈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갈수록 해야할 것 보다 하지 말아야할 것이 늘어서 적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진과 글도 붙여 놓는다. 해마다 딸의 사진을 붙여놓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성장하는 딸을 그 사진을 통해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다. 엄마가 건강하고 아름다왔을 무렵의 사진도 붙여둔다. 내 수첩속의 엄마는 항상 아름다운 모습이다.

“딸 아이의 뽀뽀, 그윽한 커피향, 갓 구운 빵,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효자동 골목길, 친구가 여행지에서 보내준 엽서, 꽃다발, 강아지들의 인사..”

읽기만해도 가슴에 등이 켜진듯 마음이 따스해지고 환해지는 글을 포스트잇에 적여 붙여 놓고 우울해질 때마다 펼쳐 보며 비타민을 먹은듯 힘을 얻는다. 


신세대들이나 얼리어덥터인 중년층에서는 “스마트폰에 메모장 기능이 있는데 왜 무겁게 수첩을 들고 다니고 일일이 기록하냐”고 나를 구세대 취급한다. 하도 자주 꺼내 들고 핸드백 안에서 치이고 이것저것 붙여 놓아 연말이 되면 너덜너덜해진 내 수첩을 보며 “10년동안 이 수첩을 계속 쓰는 건가요?”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싸구려 수첩을 쓴다고 궁상맞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명품 다이어리를 쓴다고 내 삶이 명품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디지털시대, 스마트시대라고 해도 난 수첩만은 아날로그를 고집한다.

연말이 되면 예전의 수첩들을 한꺼번에 다시 꺼내놓고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누구를 자주 만났는지, 무얼 기록해두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박또박 내가 펜으로 적은 수첩의 메모는 가장 손쉽고 확실하게 나의 과거사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뭐 대부분은 점심 식사 약속을 적은 내용이라 부끄럽기도 하다.  

어느 해에 유난히 집중적으로 만난 사람들도 있고, 그 사이에 소식이 끊긴 이들도 많고, 신문사에서 소속이나 출입처가 바뀔 때마다 내가 다니는 곳도 달라지고, 외부원고나 강의 요청 등도 해마다 다 다르다. 지난 해 수첩에 기록된 이들 가운데 벌써 저 세상으로 떠나 고인이 된 분도 있고 엄청나게 출세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몹시 억울하고 속상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일도 있고, 기자로서 인터뷰할 시점엔 너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망만 남기고 사라진 명사들도 많다.

GE의 전 회장인 잭 웰치의 부인이자 하바드비즈니스리뷰의 편집장인 수지 웰치가 쓴 <10·10·10>이란 책에는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10이란 숫자로 판단해보라고 한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화가 나건, 흥분되건, 기쁘거나 슬프거나)이 과연 10분 후까지 계속 화를 낼 일인가, 10일 후에 혹은 10년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차분하게 따져보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 당시엔 죽을 것처럼 괴롭고, 미칠듯 화가 나서 폭언을 퍼붓거나 광분을 했던 일이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보면 “아뿔사, 왜 그랬을까” “아, 그 때 조금만 냉정했더라면...”하고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새로 마련한 2012년 수첩이 아름답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기쁘고 즐거운 일만 가득하길 바랄만큼 철없지는 않다.

내년은 임진년, 흑룡의 해여서 용들이 비상하듯 곳곳에서 변화가 무쌍한 해라고 한다. 나 혼자만 여의주를 차지할만큼 용기나 재능이 있지도 않다.

다만 수첩의 작은 네모칸에 기록되는 나의 매일매일, 매 순간이 부끄럽고 치졸하고 치사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질없는 욕망에 흔들려서 주제 파악을 못하지 않기를, 정확한 판단을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경거망동은 피하기를, 그리고 남들이 보아주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온순한 시간이 기록되기를 바란다.


그림 김상민.경향신문 DB



50여년을 살면서 얻은 교훈은 그 어떤 일에건 담대하게 대하면 된다는 것이다. 괜히 쫄아서, 지레 겁먹어서 고양이를 보고도 호랑이인줄 알고 놀라고 소리지르고 그림자만 보고도 까무라쳤지만 이젠 어떤 일이건 그러려니 하는, 시간과 연륜만이 주는 지혜를 얻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해석력 결핍으로 사고를 치긴 하지만...)

그리고 이젠 또 안다. 내가 보내는 매 순간, 하루하루가 나 혼자만 살아내는 시간이 아니란 것을... 가족과 동료, 친구들, 이웃과 더불어 그들과 맺은 인연으로 나의 삶이 씨줄날줄로 엮어진다. 그래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기도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나와 만나게 될 사람들이 모두 축복이 가득하라고....

아, 왜 난 나이가 들수록 이렇게 착해지는 걸까. 본심은 내가 덜 상처받고 피해받기 싫은 이기심일지라도 그래도 남들이 잘 되라고, 행복하라고 기도하는 것은 착한 일 아닌가?  이러다 칠순쯤되면 천사의 날개가 달리는 것은 아닐까?....아, 이 병엔 약도 없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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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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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lle 2011.12.22 1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해를 보내려니 좀 심난했는데 역시 유기자님 글 읽고 (루이비통에서) 빵~~ 터져 버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작은 일상을 돌아보게 하고 웃음짓게 하는 글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작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큰 일에만 관심있는 척 하는 지 모르겠네요.
    소피아로렌을 좋아하시는군요. 소피아 로렌 닮으셨습니다. (진짜로~)

  3. 김준년 2011.12.22 2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소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것은 어떨까요. 새해에도 유기자분께 행운이 깃들길 빕니다.

  4. elene 2011.12.23 0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재밌고 유익합니다. 거대담론은 매일 봐야하는 '신문'에나 맡깁시다.

  5. 건희맘 2011.12.23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 소피아로렌..헐
    정말 닮으셨어요 수첩속 사진 다시 보면!

  6. pinggu99 2011.12.23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올해는 수첩을 리모델링해서 써야겠네요. 기자님의 글엔 늘 소소하지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거대담론이 주지 못하는 일상의 답들을 저는 기자님의 글에서 찾아요.^^*

  7. 유인경 2011.12.23 1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세상은 역시 프로덕션보다 프로모션, 즉 제품보다 홍보가 중요하군요.
    소피아 로렌 사진을 소개했더니 제가 소피아를 닮았다고 칭찬을 해주신 분들이 계시네요.
    제게는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습니다.
    전 소피아 로렌의 얼굴보다 연기력, 그리고 요리솜씨, 무엇보다 팔순이 가깝도록 열심히 일하고 건재하는 생명력을 좋아합니다.

  8. 허브 2011.12.23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가실겁니다
    쭈우~~ㄱ

    소피아 로렌보다*^^*

    우리가 계속 지켜보고 응원할거니까요^^*

  9. 네병 2011.12.23 2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된 2012년 보내시길 바랍니다

  10. 정세환 2011.12.24 2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인경기자님!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원 하시는 모든것 다 이루워지시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자님의 가정에도 신의 가호가 깃들어 항상 행복하심이 충만하길 바랄께요!

  11. 문수정 2011.12.25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젠가 이제는 하늘나라 가있는 동생일로
    뜬금없이 회사까지 찾아가뵙고 의논드렸을때
    일면식도 없는제 이야기를 끝까지 진심으로 들어주시던 모습 기억하고있습니다
    늘 좋은 글 읽고 방송에서 뵈면서도...
    제대로 된 감사인사를 한 번도 못드렸습니다

    가벼워 보일 때도 있지만..그 안에 느껴지는 깊은 내공..
    바로 15년이나 계속해서 쓰고 계신
    이 다이어리에서 나온다고 생각됩니다

    제 일상...반성하고 돌아갑니다

  12. 성미니 2011.12.27 09: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글을 읽으니 마음이 평안해 지네요^^항상 감사합니다. 주변에 많이 소개하고 있어요. 행복한 연말연시 되시길 바랍니다.*^^*

  13. poppy 2011.12.27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유인경 기자 좋다고 하니 언니가 제 친구 선배의 친한 친구라고 하네요.^^ 어느 친구인지는 저도 몰라요. 안 물어봐서. 항상 멋진 언니. 소피아 로렌처럼 멋져요. ^^ 저도 양지수첩 꼬박꼬박 사서 썼었어요. 한국에 있을때는. 이번에 교보 광화문에 가서 간만에 드뎌 양지수첩 사왔어요. 왜 그 수첩을 가지면 그렇게 뿌듯한지. 매번 좋은 글 잘 읽고 있어요.^^

  14. 빗소리 2011.12.28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그 수첩에 저도 있나요?
    있다면 가문의 영광이겠어요
    글중에 없어서 행복하다...엄청 공감이 가는 글이라서
    이달에 이사할 때 실천을 했습니다
    사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버리고 정리하다가 링거를 두번이나 맞았습니다
    체력은 뱃살에 반비례했습니다

    나날이 행복하소서

    • 유인경 2011.12.29 0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요. 빗소리님과 수다방 친구들이 우리집에 온 날, 부산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의 수첩에 빗소리님이 적혀 있지요. 새해에 더더욱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15. 날아라 분홍돼지 2011.12.29 23: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년 다이어리가 많이 나와도 역시 양지사 다이어리만한 게 없더군요.
    표지의 적절한 쿠션감이며 떨어져나가지 않는 종이도. 몇년이 지나도 그대로.
    유인경 기자님의 동글동글한 글씨도 그립습니다.

    2012년에도 행복하세요. 늘 서정적인 응원 보냅니다. ㅎㅎㅎ

  16. 청담동 조씨와 식구들 2012.01.01 13: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0년만에 찾아온 흑룡의 임진년이 밝았습니다.
    올해, 유인경기자님이 소원성취 하실거에요!
    이유는 흑룡이 돼지를 품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꾼 사람이기 때문이랍니다.
    멋짐,이쁨,똑똑,윗트,소통,의리,인간애, 이 모든것을 지닌 불세출의 여걸!
    우리모두 당신을 사랑한다구요...
    P.S: 소피아로렌의 정열적인 스스한 매력도 포함

  17. 같은 대륙 반대편 사는 여자 2012.01.02 2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담동 조씨와 식구들"님 코멘트에 "좋아요"를 클릭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요.

  18. 김대억 2012.02.09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

  19. tire changer 2012.03.02 12: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

  20. 신성옥 2012.03.10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된 수첩이라..
    글을 잘쓰시는 이유가 그냥 이뤄진게 아님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네요.
    저도 해보려구요. 감사합니다.

  21. http://www.apoautomotive.com/Nitrogen-generator-c-24.html 2012.03.19 12: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게 해주는 대목이네요.
    저도 해보려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