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드라마도 아닌데 <미생>은 폭넓은 연령층의 지지를 받습니다. 단지 수치상의 시청률이 아닌 체감지수가 높은 드라마입니다.

100만부가 팔렸다는 원작의 힘도 크지만 무엇보다 <미생>은 직장의 풍경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직장이 무대인 드라마가 많지만 회장은 사무실보다는 고급 승용차로 출퇴근하거나 복도에서 인사 받는 모습이 대부분이고 핵심 인재인 ‘실장님’들은 사랑놀음만 하고 재벌 부인은 미장원 출입하듯 남편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장면이 대부분입니다. 직장과 직업은 있지만 정작 ‘일’은 없었습니다.


가짜 직장인과 일이 가득한 드라마에서 <미생>은 보기 드물게 ‘일’이 주인공입니다. 협찬에 의존해 억지 배경이 된 패션회사나 식음료회사가 아니라 진짜 기획안을 만들고 상품을 납품하는 상사이고 다들 컴퓨터나 서류를 보고 생수통을 직접 나르며 몸으로 ‘일’을 보여줍니다. 조직의 부품이란 생각에 자존심은 짓밟히고 승진은 실력이 아닌 인맥과 로비에 따라 결정되고, 여성의 능력은 남성이라는 유령 앞에서 무시되는 ‘체험 삶의 현장’을 그대로 그려 시청자들이 각각의 배역에 자신들을 환치해 공감을 하나봅니다.

바둑에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미생(未生). 드라마 속 갑(회사)의 전쟁터에 던져진 을들(직장인들)이 미생에서 완생을 향해 가는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화면 밖 현실의 미생들은 드라마 속 미생들과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주인공 장그래만이 아니라 김 대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우직한 오 과장의 고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부정을 저지른 박 과장의 처참한 몰락에도 그 원인을 알기에 미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제작진들에게 감탄하는 점은 캐스팅입니다. 임시완 외에는 유명스타도 드물고 낯선 얼굴인데도 너무 직장인들 같아 “진짜 회사원들을 캐스팅한 것 아니냐”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을 듣습니다. 알고 보면 진짜 뮤지컬 스타, 대학로의 중견배우라는데 실감나는 프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안이 없으면 그냥 버텨라. 그게 바로 사는 거다.” “절차가 중요한 거야. 우리는 그 절차를 따르면 되는 거다.”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에서 들어보는 이런 대사에서 ‘미생’인 우리가 그래도 옷깃을 여미고 완생을 향해 가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직장인들은 여전히 바둑을 두는 기사가 아니라 기사 손에 움직여지는 바둑알 같은 존재이긴 합니다만….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Posted by 유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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